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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위기, 하나의 갈림길 스티브 잡스의 인문학과 그냥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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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이 위기고 인문학이 열풍이라고 한다. 여전히 그렇다. 개인적으로 HK Humanity Korea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지만 과연 한국의 인문학의 현주소를 물어본다면 과연 당신은 인문학을 무엇이라 생각 하냐고 되물어야 할 것 같다.



   사실 인문학의 위기는 실용성을 강조하는 경향에서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문사철’로 대표되는 인문학이 위기라기보다는 이 문사철에 해당하는 학과의 위기는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에 해당하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혹은 교수, 학생들이 줄어든다고 해서 이 학문의 위기는 아닐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학과들이 대학이라는 곳에서 위기를 맞는다는 것이 인문학의 위기를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학문 자체가 위기라는 것은 약간 의아한 일이다. 인문학이라는 것은 보통 텍스트 형태로 남아있으며 아주 새로운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 이틀 만에 없어질 것도 아니고 전공자가 줄어든다는 것만으로 과연 그 학문이 위기라는 것은 학계가 위기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학계의 위기가 학문의 위기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문학, 역사학, 철학이라면 더 말할 것이 없다. 이 학문이 대학에서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꼭 대학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인문학의 위기를 다시 기회로 만들어준 사람이 바로 고 스티브잡스이다. 애플의 전설인 이 불세출의 인물이 기술과 리버럴 아트 그 사이에 애플이 있다고 했다. 이 리버럴 아트가 인문학으로 번역되면서 인문학이 마치 창의적 어떤 면을, 미래에 돈줄이 될 만한 어떤 것이란 이미지를 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리버럴 아트를 번역하면 자유학이 아니라 아마도 교양, 구체적인 수업으로 말하면 대학에서 실시하는 교양수업이 될 것이다. 이 리버럴 아트는 관심 있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중세에 실시되던 교양 과정을 말하며 소위 교양 있는 지식인을 키우는 과정이었다. 쉽게 직접적인 직업 교육, 기술 교육을 제외하는 거의 모든 교육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문법과 수사학 그리고 변증학(논리학), 산술, 기하학, 점성술, 음악 등을 말한다. 물론 이것은 중세 당시의 기준이다. 현재의 교양 있는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과목들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기술과 현대적 교양 사이에 애플이 있다는 말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이 의미를 밝히지는 않고 그저 그가 기술과 리버럴 아트 혹은 인문학을 말했다고 잡스와 인문학 등등의 책들을 쏟아내는 것은 어쩌면 냄비적 근성의 한 단면일 지도 모르겠다. 또한 잡스의 이 멘트 또한 잡스 사후 애플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에 따라 잡스 개인이 기술과 리버럴 아트의 중간에 위치한 인물이었는지 아니면 애플이라는 회사가 그랬는지를 결정하게 되지 않을까 싶고, 단언키는 어렵지만 현재까지의 기준으로 보면 사람들에게 탄성을 나게 하는 애플의 역사는 이제 끝난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화이트헤드의 개념을 빌어 이야기하면 잡스의 인문학은 실천 이성적인 어떤 것으로 더 나은 방법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은 방법이라는 것은 더 편한 방법이 될 것이나 이것이 기술이라는 것과 결합하면 그저 생각만이 아니라 현실화될 수 있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도구적 인간의 기본이고 구석기 시대 이후에 이어져온 인간의 보편적 특징인 것이다. 기술은 그 자체로 발전하는데 그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 플랫폼을 만드는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이다. 잡스의 리버럴 아트가 무엇인지는 바로 여기에 힌트가 있다. 시대적으로 앞서 나간다기 보다는 새로운 유행,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어 경향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상상력이 바로 잡스의 리버럴 아트인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바로 율리시즈의 오디세우스라 할 수 있다. 어떤 역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새로운 꾀를 내어 위기를 탈출하고 결국 이타카로 도착하는 그 창의성이 바로 잡스의 리버럴 아트 혹은 인문학이라 불렀던 것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잡스와 같은 인물이 나오기 어렵다. 오디세우스는 이타카에 홀로 돌아왔고 그 많던 부하들은 모두 희생되었다. 또한 그는 사일렌의 유혹이 과연 어떤 것인지 경험해보길 원했던 신적인 능력의 소유자 헤라클레스 혹은 아킬레스 그리고 용맹함과 지혜를 동시에 소유한 테세우스가 아니라 아이 같은 호기심과 잔꾀가 가득한 인물인 것이다. 그가 자신의 부하들을 다 잃었다는 것은 결국 한 번의 성공을 위한 여러 번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경쟁에서 한 번의 실패는 죽음을 의미한다. 모든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모난 돌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정으로 쳐맞을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그의 부하가 되어 결국 외눈박이 괴물의 먹이가 되어야 하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최고 수준의 대학을 들어가 꿈꾸는 것이 대기업의 직원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잡스의 리버럴 아트는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위기’가 아니라 ‘불가능’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위기는 과연 허구적인 것일까?

   인문학의 위기와 인문학의 열풍은 역시 동전의 양면이다. 개인적으로 강신주 박사의 책도 방송도 듣고 본 적이 없다. 잘 모르지만 그런 대중강의가 대체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시장이 작으니 자신의 영역이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다를 것이다. 인문학의 열풍이 불었는데 인문학이 위기라는 것은 상당히 모순적인 말이다. 결국 이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위기라는 ‘인문학’과 열풍이라는 ‘인문학’이 서로 다른 개념이라 가정하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위기의 인문학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대학에서 문제이나 실용주의적인 대학 더 노골적으로 취업학원이 돼버린 상황을 해결하지 않는 한, 소위 인문학이라 불리는 학과에 가서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해도 밥 굶지 않을 사회가 되지 않는 한 이것은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대학이 이윤을 추구하지 않고 학문의 발전만을 도모한다면 이 문제 또한 해결될 지도 모른다. 어쩌면 HK 프로젝트는 바로 여기에 가장 큰 의미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열풍을 왜 불었을까? 물론 중세 유럽의 교양강좌, 귀부인들을 위한 교양 강좌로서의 인문학 강좌의 수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자기 계발이나 심리상담과 비슷한 인문학 강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보통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고 한다. 인간이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지를 밝히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어떤 삶이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밝히는 것도 목표겠지만 2000년 혹은 그 이상의 역사를 가진 학문이며 특히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아주 심층적인 논의가 있었고 이것은 우리의 학문적 문화적 유산으로 남아있다. 인문학은 사회의 중심적인 가치를 형성하는 학문이며 사회가 안정적일 때는 전혀 관심의 밖에 있을 수밖에 없는 학문이다. 현재의 관점으로는 옳다 그르다 등의 논쟁이 가능하지만 중세철학, 소위 스콜라 철학이 단단한 토대로 사회를 받치고 있을 때 인문학적 논쟁은 학자들 사이에서 없지는 않았지만 일반인들이 관심을 가질 대상은 아니었다. 더 노골적으로 냉전시대 우리나라에서 인문학이 관심이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선악은 너무나 분명했고 사회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도 분명했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또한 논쟁적이나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가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이 관심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런데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가 불분명해지기 시작했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가치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변화를 계기를 IMF로 볼 수도 있고 다른 기준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열풍이다. 이 또한 비판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정의가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사회적 정의가 무너졌다고 느꼈기에 정의가 무엇인지 질문을 제기한 것이다. 사회의 중심적 가치, 사회의 토대가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는데 하나는 사회가 옳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그 누구도 질문을 제기하고 있지 않다는 직관적인 깨달음이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 다들 그것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집단지성 혹은 대중적 비판의식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에 대학의 학자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 또한 대학에서의 인문학이 이 인문학의 열풍의 중심에 설 수 있는 하나의 힌트가 될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긍정적인 것인데 중세시대건 냉전시대건 사상적 자유가 보장되는 시대라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도그마적 상황에서 벗어나 이제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물어보는 것은 사상적 민주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인간이 절대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대중이 옳다고 믿는 것이 절대적 답이 되긴 어렵다. 하지만 그것을 찾아가고 논쟁을 하고 대립하고 갈등하는 사이에 어떤 결론을, 그것이 한시적이라 해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학계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논쟁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더 많은 토론이 있을 수 있게 화두까지는 아니라 해도 많은 논쟁점을 제기하는 것, 바로 그 과정이 인문학이 발전하는 과정인 것이다. 스콜라 철학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또한 변증법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 반론에 재반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토론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혼돈과 혼란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독재적 사고는 아닐지 의문을 던지는 것도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필수적인 부분이 될 것이다. 물론 여기에 어떤 대중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 획기적이고 새로운 플랫폼이라 해도 일반 사용자들이 그리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혹은 지금까지 그렇게 해온 애플의 모습에서 배울 점 중 가장 주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것은 간을 맞추는 것과 비슷하다. 너무 짜지도 싱겁지도 않게, 그러면서도 새로운 맛을, 대중들이 반할만 한 맛을 만드는 것은 감각적인 부분이다. 어떤 구체적인 답이 있다고 하기 어렵다. 이런 감각적인 부분을 학계, 언론, 대학에 속하지 않은 지식인들 중 어떤 그룹이 갖고 있는지 지켜보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을 것이다.

   그런데 경험으로 이 감각을 키울 수도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조금 슬프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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