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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트 러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독서일기/작은 깨달음

by Deko 2013. 6. 8.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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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 시절에 이 책을 보았고 어떤 충격을 받았다. 분명히 한글로 쓰여 있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특히 마지막 대담과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밝히는 첫 에세이에서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그래도 어느 수준 이상은 된다고 자부했었는데 택도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이 무섭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시간의 차이가 있는데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나하는. 다행히 걱정은 기우였다. 코플스턴 신부와의 대담도 어렵지 않았고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에세이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떤 면으로 상당히 뿌듯했다. 드디어 1925년 수준이 된 것인가???? 채플린이 황금광시대를 만들었고 한용운이 님의 침묵을 탈고했고 서울역이 만들어져 운행을 시작했을, 그 시대. 갑자기 눈물이, 아직도 현재로 오려면 몇 년이 더 필요한 것인가!!!!

 

     아무튼 검색에 나오는 꽤 많은 독후감들은 러셀의 에세이를 공격하는 기독교인들,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한 광범위한 기독교인들이 이 책의 내용을 비판하고 있었다. 몇 개를 보고 나서 단언할 수 있었다. 이들은 러셀의 글을 다 읽지도 꼼꼼히 읽지도 않았다. 그러니 완전히 부정도 못하고 그렇다고 긍정도 못하면서 애매하게 그가 모르는 부분이 있다. 영적인 부분은 , 어쩌고 저쩌고 그러다가 끝을 맺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렇게 믿는다.우리 시대의 성윤리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에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러셀은 광범위하게 보면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고 어떤 면으로 지적이고 인문학적인 예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표현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훌륭한 삶은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일 뿐이며 자연이 아니다. 신격화된 자연조차 이것을 대신할 수 없다.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다.

목적의 성취라는 결정론에서 벗어난 행위, 그 자체 통한 순수한 기쁨과 타인의 행복을 비는 마음, 이 두 가지의 불가분한 결합, 나누어지지 않은 결합이 바로 최고조의 사랑이다. () 최고조에 달한 섹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성적 사랑에서는 확실한 소유가 가능한 경우에만 자비가 존재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시기심이 모든 것을 망쳐버릴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사랑이란 자비(긍휼, 인 등등)을 의미한다. (p.84-88)

 

     러셀이 강조한 훌륭한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서로 긍휼히 여기고 서로 사랑하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것을 서로 용서하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거의 일치한다. 과연 교리를 따르고 주의 종놈이라고 고백하고 노예적 신앙을 갖는 것이 과연 진정한 기독교인의 모습일지 모르겠다.

 

     레셀이 강조한 것은 신이라는 존재가, 존재라 부를 수 있다면. 적어도 증명의 대상은 아닐 것이고 인간이 유치하게 만든 교리 안에 갇혀있을 존재는 아닐 것이란 것이다. 만일 인간으로 최고의 지성을 갖춘 존재라도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희미한 그림자를 보는 것뿐일 것이다. 기적이고 나발이고 신의 아들이고 뭐고 간에 인간의 삶의 문제는 항상 무거웠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는 바로 제 2차 대전의 상황으로 흘러들고 있었고 러셀이 글을 쓰던 당시 파시즘은 점점 세력을 키워갔고 각 국가에서 그 구체적 상황은 다르다고 해도 어느 정도 국가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인종차별적 경향이 널리 퍼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러셀의 가치는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광기의 시대에 합리의 정점을 찍은 것이다.

 

     인간이 신의 존재를 증명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저 신의 명령이건 자신의 신념이건 상식의 수준에서 각자가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미신적 믿음을 강요하며 인간을 무지한 존재로 만드는 모든 제도, 종교를 포함하여, 이런 것을 제거하려는 노력 또한 여기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미신이 아닌 과학적 지식과 인간과 그 외의 존재에 대한, 지구의 모든 대상들에 대한 사랑이 중심이 된 삶을 살자는 러셀의 메시지는 98년이 지난 현재에 적지 않은 울림을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더 눈길을 끈 것은 바로 우리 시대의 성윤리이다. 이 텍스트는 36년에 발표되었다.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을 땄고 동아일보에서 일장기를 지운 채 신문을 발간했던 바로 그때이다.

     성의 문제는 마치 변신과 같은 면이 있다. 특히 남성의 경우 어느 나이 때까지는 전혀 모르는 척을 하면서 은밀하게 욕망을 해소해야 하고 어느 선이 지나면 상당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또한 그 선을 넘어가는 통과의례가 은밀하고 각자가 알아서 굴절된 방법을 통해 넘어가게 되므로 성적인 부분에 관심에 애착에 반비례하여 이 부분은 억압되어 있으며 억압의 주체는 도덕 혹은 사회적 윤리 규범들이다. 과연 그것들이 인간의 훌륭한 삶을 보장하는 지 아니면 변태적 인간을 양산하는지는 합리적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성적인 기술이건 살인의 기술이건 모든 기술은 중립적이다. 그 자체로 전혀 위험하지도 그렇다고 어떤 실질적인 선한 효과가 있지도 않다. 하지만 누군가 그 수단을 들고 사용할 때는 달라진다. 훌륭한 성의 기술이 개만도 못한 바람둥이, 욕망에 노예가 된 바람둥이를 키우기도 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며 모든 수준의 쾌락을 즐기는 커플을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사실 각 개인들이 결정할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성적인 기술을 그러므로 무조건 공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러셀의 생각이다. 성적인 담론들, 야한 농담들과는 전혀 다른 그저 기술이다. 서로를 어떻게 즐겁게 해줄 수 있는가, 섹스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모든 정보는 사회적으로 공개되는 것이 좋다. 사실 기술의 공개가 조루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며 선천적으로 둔감한 이들에게 어떤 좋은 센스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성적 기술을 사회적으로 공개한다는 것은 알 수 있을 법한 정보에 더 빨리 접근하게 해준다는 정도의 의미만 있는 것이다.

     또한 현재까지 남자 혹은 아버지가 맡아온 가족부양의 의무를 점차 국가가 맡을 경우, 육아의 문제 또한 국가가 전적으로 담당하게 될 때 결혼이란 제도는 사라져버릴 것이란 것이 러셀의 생각이다. 물론 현재까지 그런 사회가 등장했던 적이 없으므로 여기에 대한 평가는 뒤로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런 상황이 온다고 해도 둘이 너무 좋아서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커플들이 있을 것이며 그들은 별처럼 달처럼 가끔은 태양처럼 빛날 것이란 사실이다. 아마도 그런 시대가 오면 조건 따져가면서 사귀는 사람들은 모래성처럼 사라질 것이며 서로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사랑하는 커플들은 결혼이라 부르건 다르게 부르건 상관없이 뜨겁게, 더 뜨겁게 존재할 것이다. 어쩌면 정말 사랑 한번 재대로 못하고 죽는 이들이 적지 않게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육아의 문제를 국가가 책임지게 되면 부부라는 것은 사회적 책임이 아주 줄어든 두 사람의 개인들의 문제이다. 이혼은 점점 더 쉬워질 것이다. 하지만 이혼을 통해 결혼의 의미가 퇴색하는 것이 아니다. 높아지는 이혼율은 의무로 살면서 불행을 어깨에 짊어지고 사는 이들은 줄어들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로 볼 수도 있고 이혼율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서로 정말 사랑하는 커플들은 더더욱 빛날 것이다.

 

러셀은 훌륭한 삶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쉽지 않음 또한 동시에 언급한다. 아마도 그래서 진짜 훌륭한 삶이 더 빛날 테지만 말이다.

 

 

     사족이지만 훌륭한 삶은 결국 행복한 삶을 의미한다. 행복한 삶이란 감정과 이성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최대의 즐거움을 쾌락을 즐기는 삶을 말한다. 즐거움과 쾌락에서 기쁨이 나오고, 긍휼함, 인한 마음 자비심에서 나오는 타인에 대한 이해는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고 남는 사랑을 낳게 한다. 그러므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역설적으로 진짜 기독교인에게 중요한 덕목은 이것이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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