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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무거운 책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독서일기/작은 깨달음

by Deko 2013. 4. 23.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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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제목은 위협적이다. 보통 열심히 일하고 시간을 절약하고 아침이건 저녁이건 어떤 인간형이 되어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삶의 지혜라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게으름을 찬양한다는 표현 자체를 그냥 받아들이기도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러셀이 이 에세이를 썼다는 것을 안 그 순간, 이 제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역설이나 반어로 이해하려할 것이다.

 

     러셀은 영국의 수학자, 철학자이자 수리논리학자, 역사가, 사회 비평가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이며 195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고 그가 쓴 서양 철학사는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하는 명저이기도 하다.

 

 

     과연 러셀이 말하는 게으름이란 무엇일까? 쉽게 생존에 관계되지 않은 모든 행위를 말하는 것이며 우리가 여가라고 부르는 행위를 말한다. 러셀은 문명의 특징으로 바로 게으름, 여가라 하였다. 사실 이것은 문명의 핵심적 개념이 생존에서부터의 자유로움이라는 것을 말한다. 생존에서 자유로움, 먹고 살려고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 어떤 의무감, 노동이야 말로 삶의 본질이라면서 이유도 모른 채 열심히 일을 하라고 하던 그때에 그 반작용으로 말하는 바로 그 게으름이다. 어쩌면 러셀은 생존과 세뇌에 의해 이유를 모른 채 무작정하기만 하던 그런 노동에 대한 모든 반대로서의 게으름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첫 에세이인 [게으름에 대한 예찬][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은 어떤 면으로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무감에 의한 노동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생각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막연한 사명감,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사명감으로 인해 일을 하는 것을 쉬운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사회성을 인간의 본질적 특성으로 간주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것이 본질적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인간이 사회 안에서 더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산다고 할 수 있다. 노동을 하는 것은 결국 소비를 하기 위한 것이다. 청교도적 윤리관은 검소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보았고 소비를 낭비로 간주하면서 악으로, 혹은 악은 아니라고 해도 그에 준하는 좋지 않은 행위로 간주하곤 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아마도 이것을 대표하는 저작일 것이다.

 

     레셀의 이론은 간단하다. 생존이 해결이 되면, 기술이 발달하고 생산성이 높아지면 덜 일해야 한다. 죽도록 일해서 물건을 많이 생산하고 싸게 공급하고 시장을 지배하고 더 임금이 싼 곳을 찾고, 세금이 적은 곳을 찾고 전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우리가 당연하다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에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그것이 과연 최고의 이윤을 향한 것인가? 여기서 이윤은 무형의 이윤과 공리주의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수의 행복이란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하면 행복한가? 누구만 행복한가? 아니 행복하기는 한 것인가? 수조원이 넘는 자산을 가진 재벌 총수도 권력에 아부하고 향응을 제공하고 그런다고 한다. 물론 미디어를 통해 접한 것이니 그 사실 여부를 나 같은 수준의 사람이 확인할 수는 없다. 돈이 그렇게 많아도 더 벌기 위해 불법을 자행하는 사람들의 인생이 과연 행복이란 개념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책으로 돌아오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노동을 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 여가를 즐기자는 것이다. 더 많이 벌려 하지 말고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일을 하고 남는 시간을 즐겨라! 빈둥거릴 사람은 빈둥거리고 수익과 상관없이 하면서 즐거운 일을 하자는 것이다.

     그저 궤변으로 보일 수 있는 이 이야기는 사실 사민주의의 원조로 간주할 수 있는 러셀의 혁명선언이다. ‘이라는 것, 기독교에서는 소명(召命)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 혹은 맑스가 말하는 인간의 본질로서의 과 러셀이 여기서 말하는 생존을 위해서 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기술문명의 발전에 따라 효율성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혹은 그와 전혀 비례하지 않고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거나 힘들어진다면 우리는 질문을 해야 한다. 발전이란 무엇인가? 진보란 무엇인가? 방향성이 있기는 하는가? 이것은 우리의 행복과 전혀 관련이 없는 그저 개념일 뿐인가? 발전은 있는 거 다 파괴하고 새로 건물 짓는 것일까?

     이미 30년대 일본의 무단통치가 조선반도를 신음하게 할 바로 그때, 이 영국의 철학자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산성이 올라가니 더 많이 생산하고 시장을 개척하고 더 많은 이윤을 올리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유이다. ? 왜 그래야 하는가. 대답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돈을 많이 벌기 위해. 혹은 그냥, 다들 하니까. 개인이 아무리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고 해도 국가와 민족의, 혹은 그런 이데올러기의 노예가 돼서는 안 된다. 개인의 가치와 사회적 가치가 같을 때도 있고 다를 때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불일치의 상황을 일치로 만들어내는 방법론 중에 하나가 바로 자유민주주의이며 근대 시민사회의 진정한 매력일 것이다. 어쩌면 바로 여기에 민주주의 혹은 시민사회의 다이내믹함, 바로 그 비밀이 있다.

 

     러셀이 말하는 것,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하고 있을 바로 그때에, 생존을 위한 일에서 떠나고 목적, 국가와 민족이건 제국이건 인종이건 어떤 것을 위해서도 사용되지 않는 순수한 지식들이 만드는 세상의 모습은 어떤 면으로 유토피아의 모습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목적이 없는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행위, 그것이 어떤 방식, 어떤 범주가 되건 창의적이며 그 자체로 행복이 되는 행위일 테니 말이다. 물론 러셀이 그저 상상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런 사회가 되기 위해 혹은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여가를 위해, 생존을 위한 시간을 빼고 난 나머지 일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가 교육의 포인트가 되어야 하며 사회 자체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러셀의 메시지는 현재 우리나라,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나라에 적지 않은 방향을 전해준다. 러셀에게 문명이란 더 이상 생존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우리는 현재 경쟁과 생존을 고민하고 있는가 아니면 거기서 자유로운가? 대답은 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러셀의 관점은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토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유한계급은 Leisure Class로 사용되기도 하고 The Idle Class로 표현되기도 한다. The Idle Class는 찰리 채플린이 만든 영화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어떤 관점이 포함되어 있는 용어인 것 같다. 러셀은 우리 모두가 레저 클래스가 되자고 하고 있고 찰리 채플린과 토스타인 베블런, 헨리 조지의 관점들은 약간씩 다르다. 비교해 보는 것도 아주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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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유용한 지식과 무용한 지식은 목적의식이 없는, 목적의식이 있는 정도의 번역이 더 좋았을 것이고 금욕주의라는 번역은 스토아학파적인으로 번역되면 더 좋았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금욕주의적 스탠스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지만 죽음에 대한 스토아학파적인 스탠스는 아주 구체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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