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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혁명과 조혜련

독서일기/작은 깨달음

by Deko 2012. 4. 1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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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우먼 조혜련이 강심장에서 데이비드 홉킨스의 이론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얼마 전 그녀는 이혼했다. 물론 그녀의 이혼이 칭찬받을 일은 아니라 해도 그렇다고 비난할 일은 전혀 아니다. 

현재도 수많은 커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이혼하고 있으며 분명히 있을 수 있는 일, 어쩌면 그리 특이한 일도 아니다.

 

그런데 걸리는 것이 있다. 그녀가 바로 데이비드 홉킨스의 이론에 상당히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데이비드 홉킨스의 이론에 

아주 적합한 인생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전적으로 그렇다고 판단할 정보와 자격은 내게 없다. 그저 그런 인상이라는 

것이다.


데이비드 홉킨스는 일련의 감정들을 모아놓고 위계질서를 만들었다. 쉽게 후진 감정부터 덜 후진 감정까지. 아주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런데 이 이론을 적용하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 번째 확실한 감정을 주체, 그 감정을 느끼는 주체가 필요하다. 바로 쉽게 ‘나’라는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굳이 언급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 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주어 혹은 주체 그리고 동사 목적어 등등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도 유러피안 랭귀지의 특징이다. 

이런 구조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요즘 서구 철학의 분위기이기도 하다

‘나’에 대한 강조는 관계 속의 내가 아닌 관계를 떠난 나를 의미하는데 이 또한 서구철학의 기본적 개념, 선험적 자아 혹은 

비연고적 자아와 일맥상통한다.

 

두 번째, 만들어진 위계질서는 상승의 이유가 된다. 다시 말하면 밑바닥의 감정에서 상층부의 감정으로 올라가야 한다. 

상층부로 갈수록 선험적 자아 혹은 비연고적 자아가 되며 개별성, 특수성은 없어지며 추상적 성격을 보이게 된다. 

자아 발전이란 개념으로 보면 계속 무언가에 도전해야 하며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며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을 멈추는 

순간 정지가 아니라 퇴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게 한다. 바로 이것이 상승 욕망과 그 가속도에 대한 문제이다.

 

물론 데이비드 홉킨스의 본편적 인류애 등등의 설래발에 동감하거나 공감한 분들은 이거 좀 이상한 이야기다 하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순적인 관계가 있는데 를 강조하는 구조로는 진정한 인류애로 나아가기 어렵다. 왜냐하면 인류애라는 

것도 결국 구체적 관계에서 시작하는 것이지 추상적인 혹은 전혀 다른 레벨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쉽게 내 자식에게 도시락을 싸주는 어머니의 마음이 확장되면서내 가족내 아이내 부모 등등 인간이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많은 집단들이 확장되면서 결국 도달하게 되는 것이 인류애이며 그렇게 되어야 하지 무슨 깨달음으로 

그렇게 갈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다지도 예수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지 모를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런 깨달음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그런 깨달음은 구체성이 있어야 한다예수는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 받기 어렵다고 했지만 부처는 자신의 부인과 자식을 모두 출가시켰다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부처는 

관계의 확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두 성인을 동일하게 비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변선환역 불타와 그리스도를 참고하시라, 그런데 절판된지 꽤 되었다. )


아무튼 깨달음 얻겠다고 출가를 하고 가족의 인연을 끊고 그러는 것들은 한번 물어봐야 한다. 너 혼자 깨닫는 거 그게 

네 삶, 네 관계보다 더 중요해? 너 혼자 깨닫겠다고 가족들에게 피해주는 거 어떤 식으로 합리화할 수 있어? 

그 자체로 가족에 대한 폭력 아니야??? 

 

아무튼  데이비드 홉킨스 또한 인지하건 못하건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플라톤의 영향 아래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쉽게 서구

철학의 프레임 안에 갇혀 있으며 공부와 수양이 모자르다할 수 있다.



 

과연 그 윗동네 감정들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가? ‘나’에 대한 확실한 개념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가?

 사실 이 질문을 먼저 해봐야 한다. 


아주 쉽게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내가 어떤 상황에 어떤 감정을 주체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런 감정들은 그냥 올라온다. 

문제는 그런 감정들을 상황에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이지 그런 감정들을 위계질서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감정 사이에 무슨 위계질서가 있겠는가???

미움은 미움이고 사랑은 사랑이고 분노는 분노고 슬픔은 슬픔이다. 서로 다르다.  


문제는 그런 감정들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것이지 그런 감정 자체가 문제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쉽게 화를 내고 

어떤 이는 쉽게 즐거워하고 낙천적이다. 태생적인 차이가 있고 살아온 환경의 차이가 있다. 같은 상황에 느끼는 감정들은 

개개인에 따라 다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감정들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 과정이 원활해진다면 

느껴지는 감정들이 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갈등이라고 하건 오해라고 하건 상처라고 하건 이런 것들, 그런 감정들의 원인은 바로 가장 가까운 가족들 사이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친구 혹은 사회, 직장 등등에서 느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런 감정들은 커뮤니케이션의 

강력한 이유가 된다. 존재론 적으로 나는 네가 아니다. 게다가 인간의 언어는 완벽하지 않다. 결국 언어 외적의 요소들을 통해야

만 경우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린도 전서 13, 그 유명한 사랑장이 왜 ‘~을 알리라라고 끝나는지 온유하고 

오래 참아서 결국 무엇을 알게 될 것인지 한번이라도 고민해본 사람은 아하 ! 하고 이해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많이 후지다 ^^)

 

이제 나올 수 있는 질문은 그렇다면 진짜 행복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한 문장으로 대답하기 어렵다. 어쩌면 더 쉽고 구체적인 질문은 어떻게 균형을 이룰 것인가? 치우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일 것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추해지기 쉽다. 균형을 잃고 어떤 종교 어떤 

가치관에만 빠지면 그 자체로 인간이 추해지기 쉽다. 균형을 이룬 인간이 더 아름답다. 어쩌면 행복은 어떻게 아름다운, 

혹은 예쁜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치우친 삶은 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저 윗동네 감정들이라 해도 말이다. 모든 것은 국물이 우러나오듯 진국이 우러나오듯 자연스레 우러나와야 한다.


성숙함의 결과물로서 말이다.


또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균형 감각이 중요하다.

그렇다 감각이다. 센스이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데카르트 형도 이성을 굿 센스, 봉상스라고 했다.

감각은 타고나는 것으로 보이지만 훈련을 통해 키울 수 있다.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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