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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겨 스케이팅의 해설, 여왕 김연아 선수에게 어울리는 수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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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팎으로 우울한 현재, 김연아 선수는 다시 한 번 우리의 가슴에 뜨거운 열정을 불살라주었다. 완벽함, 레벨이 다른 완벽함을 선보였고 그동안 그렇게 인연이 없었던 세계 선수권을 차지했다. 사실, 다시 돌아왔으니 메달 권에만 들어가도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김연아 선수는 자신의 한계를 또 다시 넘어섰다. 이제는 그녀가 광고를 아무리 많이 찍건 돈을 아무리 벌건 뭐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에 인사청문회를 거쳐 자진 사퇴한 분들의 삶과 비교를 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그동안의 여러 가지 일들을 보면 사실 김연아 선수가 다른 나라로 망명하지 않은 것이 대견하다고 할 정도이다.

      피겨스케이팅이나 리듬 체조 그리고 댄스 스포츠의 경우 상당히 애매한 위치에 있는 스포츠이자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의상을 비롯한 메이크업은 선수의 동작이 돋보이는 매개체이다. 선수의 동작은 약속된 몇 가지 동작과 창의적인 안무까지 스포츠의 관점에서 평가를 받는다. 다시 말해 어느 수준 이상의 신체적 능력으로 약속된 동작들을 아주 확실하게 재현해야 하는 것이다. 관점은 약간 다를 수 있지만 사실 클래식 음악도 이와 비슷하다. 약속된 음악을 연주해야 한다. 그런데 유명 오케스트라 사이의 차이, 프로 오케스트라와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유명 오케스트라 사이의 차이는 일반인이 감지하기 어려운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섬세하게 그 차이를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다름의 문제이지 우열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프로와 아마의 차이는 분명히 우열의 문제이다.



체코 버전의 해설이다. 차이가 느껴지실지 모르겠다.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이냐면 세계 선수권에 진출한 선수들은 유명 오케스트라와 같다는 말을 하려하기 위함이다. 또한 피겨 스케이팅이건 다른 스포츠건 보는 이들이 이 스포츠를 잘 즐기고 감상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시청자들이 감상하도록 더 즐기도록 그래서 저변이 더 확대되도록 하기 위해서 해설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매번 피겨 스케이팅의 해설은 어떠했는가? 무슨 투덜이 스머프 버전 아니었는가? 회전수가 모자라고 엣지가 어떻고 랜딩이 어쩌고, 랜딩이란 말이 과연 방송에서 쓰기 적합한 말인지도 잘 모르겠으나 김연아 선수의 연기에 숭배 모드, 가산점이 모자르다고 또 투덜이 모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시청자들이 몰입하게 하고 감상하게 즐기게 하여 피겨가 스포츠이면서 예술이라는 것을 재확인하게 할 수 있어야 피겨 스케이팅 자체의 저변이 확대될 것이다. 가산점을 주거나 감점을 주는 것은 심판들이 할 일이다. 물론 심판단의 결정에 반대되는 의견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해설자 주제에 조목조목 따져가면서 채점을 할 필요가 없다. 왜냐? 그건 해설자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식으로 채점하듯 떠드는 해설이라는 것은 피겨 스케이팅이 예술로 승화되는 것을 방해한다. 그저 스포츠로 머물 뿐이다. 스포츠와 예술은 이원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라도 원하기만 하면 올라갈 수 있는 수준은 아니겠지만 스포츠의 단계는 사실 예술적 단계보다는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신에게 선택받은 혹은 간간히 등장하는 천재들만이 스포츠적 조건을 만족시키면서도 예술로 승화된 연기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김연아라는 천재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해설이 과연 김연아 선수의 수준을 따라갔는가?

     이 질문에 대답은 확실하다. 김연아 선수는 별종(別種)이다. 홀로 세계 최고가 되었다. 그러니 국내 피켜 스케이팅이 기타, 다른 수준들이 김연아 선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중계와 해설이다. 중계와 해설의 수준에 따라 대중화의 정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쉽게 계속 회전수가 부족하다, 에지가 잘못되었다, 뭐가 문제다, 저게 문제다.’라고 하면 사람들도 그것에 집중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피겨스케이팅을 기능적으로 보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스포츠의 수준까지만 보게 되는 것이다. 그 이상의 부분, 특히 예술적인 부분, 감성적인 부분, 손끝에서, 표정 하나에서 전달되는 깊은 감성을 음미할 시간도 없이 그저 저 동작이 잘 되었나 아닌가 등의 전체가 아닌 부분을 보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맡은 일이 있다. 쉽게 축구에서 공격수는 공격의 임무를 수비수는 수비의 임무를 다하면 된다. 채점은 심사위원들이 하면 된다. 결과가 나오고 나서 좀 이상하다 등의 평가를 내릴 수 있으나 해설자가 심사를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정말 심사위원들이 문제라면 내부에서 투쟁하고 싸워나가야 할 것이다. 방송은 일반인들 그리고 피겨스케이팅을 사랑하는 혹은 사랑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모든 기준에 거기에 맞추어야 한다.

     솔직하게 현재 피겨의 인기는 김연아 선수에서 시작해서 끝이 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현재 가장 중요한 목표는 김연아 선수 개인의 인기를 어떻게 피겨 스케이팅 전체로 옮겨올 것인가 일 텐데 해설자는 모든 선수에게 지적질을 했고 김연아 선수는 찬양을 했다. 지적질도 그리고 찬양도 좋은 해설자라면 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공연 앞에서 해설자가 할 가장 좋은 태도는 그저 닥치는 것이다. 침묵. 그 침묵은 보는 이들이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하게 하기 위함이다.

 

      다시 한 번 김연아 선수는 별종이다. 홀로 유아독존이다. 다른 저변이 김연아 선수를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인정하고 그저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특히 해설의 분야는 스포츠와 예술 사이를 애매하게 있는 피겨 스케이팅이나 리듬 체조 등에서 순간적으로 해외의 해설을 따라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저 자신이 맡은 일만 다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게 퀸이 계시는 국가의 바로 그 수준에 맞추는 지름길일 것이다.

 

     정 안된다면 공연예술계에 있는 사람이나 미학자 진중권 선생 등을 모시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이 축구를 보는 국민 눈높이을 올렸듯이 김연아 선수를 통해 공연 예술 전체에 대한 국민적 시각을 높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견인차를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의무감 있는 사람이 피겨 해설을 하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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