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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던 500만, 정치인 박근혜의 저력과 야당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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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대 대선에 대한 다양한 분석들이… 사실은 없었다. 일각에서 말하면 적벽대전에 대한 비유는 적절했던 것 같다. 야권이나 여권이나 일대일로 전력을 다해 부딪쳤고 결론은 여권의 승리였다. 물론 여권의 승리라 부르기엔 약간 문제가 있다. 박근혜 당선자는 411 총선에서 여권이 얻은 표에 약 4-500만표를 더 받았다. 쉽게 411총선에서 받은 표에 약 50%에 달하는 표를 더 받은 것이다. 이것은 대선이 총선에 비해 더 투표율이 높다는 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그래서 사실 여권의 승리라고 부리기보다는 박근혜 당선자 개인의 승리라고 간주하는 것이 더 옳은 것 같다.

     박근혜 당선자는 우리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네거티브가 통하지 않는 정치인, 혹은 상대방에 네거티브를 하면 할수록 반대로 지지도가 탄탄해지는 정치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박근혜 당선자의 개인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어쩌면 그런 면에서 무적(無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치인이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적어도 50대 이상의 사람들이 기억하는 박근혜 당선자에 관련된 몇 가지 장면이 있다

     육영수 여사가 사망했을 때 독일에서 돌아와 장례를 치르던 모습, 10.26 이후 모래성처럼 무너진 권력의 무상함과 국장을 치를 때의 모습, 그리고 기억은 점프를 한다. 차떼기란 말로 대표되는 신한국당의 부정비리 사건과 천막 당사를 이끌며 당을 추스르던 모습, 그리고 2007년 당내 경선에서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한 모습, 그리고 이후 총선 공천에서 친박계의 의원들이 대거 공천 탈락하고 세력이 위축된 모습, 그리고 새누리당으로 다시 당명을 바꾸고 19대 총선을 승리로 이끈 모습. 

 

    차떼기 이전과 이후로 그 이미지를 나누어 볼 수 있다. 차떼기 이전은 영애님으로의 이미지이며 차떼기 이후는 정치인 박근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두 이미지가 대립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대표적 모멘텀들이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인간적인 연민이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 불쌍하다고 느껴지는 감정들은 사실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것으로 그 위력은 우리의 상상을 능가한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며 그 힘은 상상이상이다. 마음이 한번 그렇게 흘러가면 그것은 쉽게 돌릴 수 없다.


     게다가 인간의 기억이란 분명히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나 기억한다는 행위 자체는 언제나 현재형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이들에게는 유신이, 그 고통이 언제나 현재형이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벌어진 비극이 언제나 현재형이며 또한 박근혜 당선자의 극적인 혹은 비극적인 모멘텀들이 현재형이다. 기억은 중첩되면서 강해지고 하고 더 선명해지고 하고 물론 희미해지다 사라지기도 한다. 이미 지나버린 일이긴 하지만 이정희 전 후보가 토론회에서 보여준 모습은 사실 판단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했던 말들이 이미 팝캐스트를 통해 야당 지지 성향의 유권자들에게는 많이 알려진 것이었고 박근혜 당선자의 당황하는 모습, 난감해하는 표정 등은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여기에 골든 크로스에 대한 언급은 어떤 감정과 어떤 상상을 하게 했던 것 같다. 만일 박근혜 당선자가 대선에서 졌다면, 그랬다면 그 오랜 시간 대세론의 주인공이었고 가장 강력한 후보였는데 마치 2002년과 비슷하게 패배했다면 정말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고 안쓰러워하며 너무 불쌍하게 느낄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숨어있던 500만의 비밀이 있을 것이다. 야당의 안일한 전술을 박근혜 당선자는 역으로 모두 흡수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아마 역대 최다 득표로, 과반수가 넘는 득표로 당선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 당선자는 어떤 관점으로도 전무후무한 정치인이다. 현재 여권의 어떤 정치인이 다음 후보가 될 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박근혜 당선자 같은 지지를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은 항상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한쪽으로 흘러가면 그 방향을 돌리기 쉽지 않다.



     요즘 민주당에서 나오는 대선 패배의 원인 분석은 참으로 답답하다. 무엇보다 박근혜 당선자를 잘 알지 못했다. 혹은 평가절하하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대세론의 주인공이었는데 말이다. 또한 민주당이야 말로 과거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래서 단일화하면 이긴다, 안철수 교수가 지지유세를 하면 이긴다, 투표율이 75%가 넘으면 이긴다 등등등, 본인들의 노력은 정말 눈곱만큼도 없이 그저 감나무에서 감이 그냥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막 떨어지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선거 캠페인은 더 한심하다. 민주당과 선거 캠프에서 결과적으로 했던 것은 정권교체와 투표참여이다. 411 총선에서 말한 것은 정권심판과 투표참여이다. 정권교체와 정권심판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전술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이다. 승리한 전술도 아니고 실패한 전술을 들고나와 이기기를 기대한다는 자체가 사실 기가 막힌 것이다. 박근혜 당선자를 분석하는 것도 서툴렀고 대선 전술을 만드는 것도 서툴렀다. 전통 있는 정당이라는 민주당이 이렇게 안일한 대처를 했다는 것은 국민들 앞에 석고대죄를 해도 모자랄 판이다. 또한 안철수 교수에게 너무 흔들린 것도 문제였다. 전쟁 중에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 그런데 전쟁 중에 사령관을 바꾸는 일을 했다. 그 명분이 바로 새정치였다. 그런데 새정치는 선거에 이긴 후에 해도 되는 것 아니었나? 대체 그 새정치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안철수의 새정치가 2002년 노무현 정신, 참여정부의 새정치와 이론적으로 얼마나 다른지도 잘 모르겠다. 둘 모두 상식에 기반을 한 사회를 말하며 시대적 차이에 의해 복지가 더 강조된 것을 제외하면 대체 차이점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다. 물론 새정치에 대한 열망은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변화 혹은 진보를 원하는 국민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비판적 관점은 항상 중요하며 비판을 통해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이슈가 선거 캠페인 과정에 나왔다는 것과 새정치의 프레임을 만들지도 못했다는 것은 새정치 논의에 썼던 에너지를 생각하면 정말 기가 막힌 일이다. 특히 선거전 일주일 동안의 민주당의 행보를 보면 정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정권교체, 투표참여만을 부르짖는 답답한 모습만 보여주었다. 사람이 희망이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고 사람이 먼저겠지만 이 구호 또한 의미가 확대되면 강렬하게 사람들의 가슴에 남지 못했다.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인 이유는 우리에게 행복추구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그 행복의 개념은 각 개인이 다를 수 있다고 해도 사람이 먼저라고 한다면 그 안의 가치인 ‘행복’에 다가가서 강한 이미지를 만들어야 했다. 캠프의 안일함에도 불구하고 후보의 역량으로 인해 역대 두 번째로 많은 득표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민주당은 문재인 의원을 중심으로 뭉쳐야 하며 문성근 고문은 다시 한 번 혁신과 통합을 외쳐야 한다. 어차피 어려운 시기가 되어야 피아의 구분이 쉬워진다? 강력한 야당만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자신을 던지는 희생적 모습만이 다시 5년을 기다리게 하고 기대하게 만드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안 미디어를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안일한 대책이다. 지상파 방송의 노조들이 그렇게 모든 것을 걸고 장기간의 파업을 통해 싸워왔다. 대안 미디어를 만드는 순간 기존의 모든 미디어의 권위와 영향력을 외면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팝캐스트와 인터넷을 통한 방송 들을 하나의 센터 안에 묶어 팝캐스트의 성격을 유지하면서도 마치 정규 방송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정치적 테마를 다룬 많은 팝캐스트 방송 혹은 파일은 대선을 중심으로 한시적으로 기획된 것이 많았다. 이제 이 한시적인 방송들을 정규 방송 화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지상파 방송을 포기하지 말고 모든 힘을 모아 방송 정상화를 위해 싸워야 할 것이다. 이 싸움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얻어낸다면 이것 또한 변한 야당의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패배한 이후 대안 미디어를 말해도 늦지 않다. 어쩌면 현재 대안 미디어를 말하는 것은 소극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대선은 끝났지만 할 일은 너무나 많으며 또한 대안 미디어를 만드는 것이 최우선 과제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더 늦기 전에 여당은 당선자의 권위를 더욱 강력하게 하기 위해 야당은 지지자들을 위해서라도 수작업 재검표를 하는 것이 가장 급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100만표의 표차는 재검표로 뒤집힐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하겠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이번 대선에서 영화 ‘광해’ 효과를 주장했다. 문재인 의원의 득표수가 영화 ‘광해’의 관객 수와 비슷할 것이라고 말했을 때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득표수가 더 많았지만 말이다. 어쩌면 정치인 문재인 의원의 개인적으로는 현재의 상황이 분명히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 만약에 당선이 되었다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약간 변형된 영화 광해처럼 인식되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김어준 총수의 닥치고 정치에 언급이 되고 친노 성향의 지지자들에게 문재인이란 사람이 발견되었을 때, 그리고 411총선과 대선까지, 분명히 존경할 만한 분이고 훌륭한 분이지만 외부의 다양한 도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야당의 수장으로 5년간 여당과 정부와 효과적으로 싸우고 효과적으로 대화하고 합의하여 나간다면 다음 대선에선 비교할 만한 대상조차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 문재인의 탄생이야 말로 고노무현 대통령님을 강장 영예롭게 보내는 방법일 수 있다. 시대의 조류를 타는 것과 스스로 시대의 조류를 만드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언제나 위기는 가장 큰 기회가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정치. 진짜 새로운 정치는 어느 한 정치인이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유권자가 주권자로서의 모든 권리를 온전히 누리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 역사에서 18대 대선은 왕정 문화의 마지막이 될 수 있다. 역사와 문화의 패러다임은 한 번에 혁명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모든 혁명은 저항으로 인한 보수적 변화를 야기하기 마련이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역사는 한발의 총성으로 바뀌지 않는 것 같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늘어나고 더 참여하면서 서서히 바뀌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왕정의 마지막과 민주의 진정한 시작점에 서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유권자는 무조건 지지에서 조건적 지지로 돌아서야 할 것이며 대다수가 특정 세력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 세력이 되는 것이 개개인들에게 가장 유리할 지도 모른다. 쉽게 정치와 국민이 밀당하는 것이다. 선거 막바지까지 유동표가 4-50%가 된다면 국민을 마음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하겠는가? 참여는 높고 마음을 쉽게 밝히는 않는 것, 이것이 주권자로서 국민이 할 수 있는 현명한 태도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정치인들은 싫어하겠지만 말이다.


     왕정과 민주사이의 변화와 더불어 또 하나의 변화, 패러다임의 변화를 생각할 수 있다. 옳고 그름과 좋고 싫음의 랑데부이다. 투표를 비롯하여 우리의 많은 판단의 기준은 옳고 그름이라기보다는 좋고 싫음이다. 좋고 싫음이 옳고 그름과 항상 일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옳은 것이 더 좋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담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어쩌면 진정한 새정치의 핵심 내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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