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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 성장에 대한 이야기, 마르께스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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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건 짐승이건 식물이건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나이를 먹는다. 또한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 태초에서 현재까지 이것은 변하지 않은 법칙이다. 물론 종교적 신념 혹은 믿음에는 어긋나는 말일 수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90세의 노(老)기자가 있다. 현재까지 칼럼을 연재하며 현역으로 활동하는 인물이다. 아마 이 글을 쓰는 나를 비롯하여 읽는 분들도 90세라는 나이를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여러 분들의 10살 때, 혹은 현재 나이의 절반일 때를 생각해보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그때는 분명히 과거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하지 않기도 하고 못하기도 하다. 아주 다행스럽게. 만약에 우리가 과거의 모든 사실을 기억한다면 하루를 기억하기 위해 다른 하루가 필요할 것이다. 과거의 하루를 기억하기 위해 하루를 보내는 나를 기억하는 행위까지 일어난다면 이것은 거울 사이에 무한히 반사되어 기억만으로 기억을 하는 행위만으로 무한대의 충격의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말을 하려하는 것은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인데 우리의 뇌 어딘가에 과거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다고 하면 우리는 그 기억을 꺼내, 그때의 일을, 그 각각의 이미지들을, 그때의 감정까지도 바로 지금 재현 혹은 재생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지금 말이다. 여기서 이미 알아챈 분들이 있을 수도 있는데 사실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개념으로 존재한다. 실제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이 파편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한 기억되고 혹은 저장되어 있을 뿐이다. 온전한 과거가 아니라 그저 일부분일 뿐이며 또한 데이터일 뿐이다. 이것을 꺼내 재현하거나 재생하는 행위는 우리의 인식 안에서 이루지지만 이 또한 현실이며 사실이며, 그리고 현재이다. 

     5세 때의 인식과 생각, 판단의 주체였던 ‘나’와 10세 때의 ‘나’, 20세, 30세 …. 그때의 ‘나’도 나이며 저때의 ‘나’도 나다. 나이를 먹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다. 쌓여가는 지층처럼 층이 질 수도 있고 더 성숙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동일성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전혀 다른 ‘나’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90세의 ‘나’ 혹은 100세, 200세의 ‘나’ 또한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플라톤의 이원론을 연상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본질적인 ‘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바로 그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냥 그렇게 있는 ‘나’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굉장히 보편적인 이야기인데 이렇게 복잡하게 글을 쓰는 것을 보면 아직 글 쓰는 재주가 좀 모자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여기까지가 바로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의 워밍업이다. 또한 마르께스의 세계, 매직리얼리즘이라 불리지만 알고 보면 진짜 리얼 리얼리즘인 마르께스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워밍업이다. 물론 이것은 한번만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도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저 쓰는 말이 사람에 따라 약간 어렵게 느껴질 뿐이다. 또한 섬세함, 감각적으로 섬세함은 사람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무딘 사람은 한번 느껴보지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도 없겠지만 섬세한 사람들은 가끔 생각, 감각, 인식의 주체로서의 ‘나’와 실재하는 ‘나’ 현실에서의 ‘나’와의 거리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이 영화 혹은 이 소설의 주제는 사랑이다. 개인적으로 아주 유쾌하게 본 영화이고 작게는 라틴계 남자들의 속마음을, 크게는 모든 남자들의 속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문화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두 가지가 크게 공감을 얻기 어렵다. 첫 번째는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다. 어머니가 유명 여배우나 초절정의 미모에 완벽한 동안이 아니라면 사실 어리고 귀여운 여자들을 선호하는 문화권에서 어머니에 대한 연정을 품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물론 마마보이인 남자아이가 자신을 보호해주고 의지할 여인을 찾는 것과는 약간 다르다. 어머니라는 의미가 완전히 없다고는 할 수는 없으나 기본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포인트는 바로 성적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 그렇다. 어머니를 성적 대상으로 인식한다. 모든 비극은 여기서 출발한다. 두 번째는 바로 사창가의 인접성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창가건 공창가건 쉽게 볼 수 없다. 사창가의 대명사 청량리도 이제 재계발이 된다고 한다. 물론 8-90년대에는 서울 곳곳에 사창가가 있었다. 그런데 콜롬비아의 사창가는 좀 달랐던 것 같다. 어쩌면 사창가라는 명칭보다는 매음굴이란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상당히 야한 파티와 매춘이 이루어진 것 같다. 실제로 많은 작가들과 화가 음악가들이 사창가에서 서로 친교하며 많은 영감을 나누었던 것이 사실이고 원작자인 마르께스가 주로 머물렀던 사창가는 현재 관광명소이면서 영업도 한다고 한다.


     영화의 시작에서 주인공은 정말 육덕진 흑인 창녀와 관계를 한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찾아갔고 두 번째는 스스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들어갔고 돈을 지불했다. 과연 소년 아니 아이인 주인공이 창녀와 관계한 이유는 무엇일까? 성적으로 성인이 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성적으로 성인은 왜 되어야 했을까? 자신이 성적인 대상으로 인식하는 어머니와 관계를 하기 위함이었다. 아이의 마음속에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어머니가 있었다. 성녀(聖女)인 어머니를 취하기 위해 창녀(娼女)와 관계하는 것은 재미있는 설정이다. 둘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욕망과 사랑은 서로 어긋나 뒤틀려버렸다. 원래 한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점점 더 서로 닿을 수 없는 곳으로 향해간 것이다. 물론 연애 따로 결혼 따로, 결혼해도 섹스 파트너는 한두 명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특별한 이야기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사실 여기까지 오면 영화의 모든 의문은 해결된 것이다. 욕망과 사랑은 거리는 결국 주인공으로 하여금 마음속에 어머니를 숨긴 채 수많은 창녀들을 찾아 헤매게 했던 것이다. 90세의 생일에 가장 먼저 찾은 곳 또한 어머니의 무덤이었고 그는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무덤에 올렸다. 아주 상징적으로.

     90년의 세월 동안 그렇게 터져 나오는 욕망은 수많은 욕망의 대상을 만들었지만 그 욕망은 대상은 불완전 했으며 마음속의 어머니를 대체하지도 못했다. 여기서는 아마 ‘감히’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녀들은 어머니를 감히 대체하지 못했고 그 또한 어머니 혹은 마음속의 사랑에게 감히 창녀에게 대하듯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슬픈 것이다. 그의 기억속의 여인들, 어머니를 제외한 여인들은 그저 창녀와 동일하게 인식되며 욕망의 대상으로서도 불완전하다. 물론 이 슬프다는 정서는 주인공 개인의 것이다. 주인공 또한 불쌍하고 슬프다. 한때 결혼을 약속했던 여인은 40년이 지난 후 그가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 대다수의 여인들, 창녀들이 그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겨우 기억한다고 해도 성격 좋은 물주정도로 인식할 것이다. 그는 그저 수많은 물주, 호구 중 하나였던 것이다. 물론 그의 단골이었던 까실다Casilda의 경우는 좀 다르겠지만 말이다. 허나 그래봐야 많은 창녀 중에 한 명이겠지만 말이다. 주인공의 말처럼 말이다.


      90세에 드디어 주인공은 성장을 하기로 결심한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의 생식능력 혹은 정력을 시험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소녀 혹은 델가디나Delgadina 만나고 많은 것이 달라진다. 그동안 봉인되었던 연애의 감정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연애의 감정은 편지의 형식인 서간문으로 마치 에세이처럼 신문에 연재되고 델가디나 혹은 한 소녀는 주인공 엘사비오와 간접적인 방식으로 서로 교감한다. 그런데 그녀는 좀 다르다. 주인공이 만난 창녀들의 특징은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랬기에 그도 자신의 밑바닥을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나체의 모습, 비만 체형, 늘어나고 두툼한 몸뚱이에 너무나 자연스런, 비밀이란 존재할 수도 없는, 광장 한가운데 전시된 것 같은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델가디나는 자신의 얼굴을 가린다. 그 모호함이 주인공에게는 구체적인 한 여성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너무 구체적이고 3D화면처럼 리얼한 모습의 창녀들은 그저 그녀들로 인식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한계가 있다. 그녀는 그저 어머니의 대체, 현실의 여자가 아닌 그저 엘 사비오의 개념 속에서의 여인이다. 이것은 어머니의 유품이었던 귀걸이가 가짜인 것과 서로 통하는 상징이다. 진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짜인 것이다. 이 거리는 마지막에 델가디나 혹은 한 소녀가 자신의 일상의 모습으로 90세의 엘사비오와 나체로 몸을 포개며 사랑을 하는 순간 허물어지며 그저 그와 그녀로 사랑을 한다. 그리고 세상이 달라졌다. 물론 그저 ‘나’, 엘 사비오가 바뀐 것이지만. 성장했고 이제 성인으로 사랑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수줍고 내성적이었는데 그것을 감추기 위해 정반대로 행동했다. 어쩌면 이 고백은 모든 남성들에게 약간씩은 적용될 수 있는 것이리라.


     90세라는 나이는 그저 상징적인 나이일 것이다. 어쩌면 정신적인 나이로 해석하게 된다면 사실 주변에 특히 20대에 엘 사비오같은 내면을 지닌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영화는 이런 내용, 의미 말고도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 자신이 나고 자란 집이란 공간 안에 여러 시간이 겹치는 것은 기억한다는 행위, 추억한다는 행위의 현재성을 생각해보면 그리 특이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로사 까바르까스와 마치 텔레파시처럼 대화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이다. 로사 까바르까스는 쉽게 뚜쟁이 할멈으로 셀레스티나를 비롯하여 스페인 문학과 유럽 문학에 전통적으로 등장하는 캐릭터이나 보통 이기적이며 돈만 아는 캐릭터이다. 그저 창녀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혼전정사나 혼외정사 혹은 불륜도 전담하는 전 방위 뚜쟁이이다. 그런 그녀가 지식인인 엘 사비오와 정신적인 교감을 한다는 자체도 특이하지만 그녀와의 교감에서 결국 엘사비오의 아이, 약 10세정도의 아이가 튀어나오는 것이 이야기에서는 더 의미 있을 것이다. 찰리 채플린의 딸인 제달린 채플린의 연기는 아주 훌륭했다. 또한 주인공인 엘사비오 역할은 에밀리오 에체바리아Emilio Echevarría가 맡았다.

 


     2000년 멕시코 영화의 힘을 보여준 아모레스 뻬로스에서 거지 홈리스 개아범 킬러로 열연을 한 배우이다. 이 영화에서도 상당히 리얼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의 연기력은 영화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또한 엘사비오 마음속의 창녀 역할, 까실다 역할은 더 재미있다. 스페인 마드리드 출신의 앙헬라 몰리나Ángela Molina가 맡았다. 아는 사람은 아실테지만 부뉴엘 감독의 명작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 섹시한 꼰치따 역할을 맡은 배우이다. 또한 알모도바르 감독의 라이브 플레쉬에서 주인공에게 섹스 테크닉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특히 욕망의 모호한 대상의 히로인 꼰치따의 특징은 이지적이고 냉정한 모습으로 유혹하고 섹시한 팜므파탈적인 모습으로 도망간다는 것이다. 어쩌면 밀당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줄 것처럼 안주는. 게다가 젊은 시절의 까실다 역할은 그녀의 딸인 올리비아 몰리나Olivia Molina가 했다. 처음 보고 너무 비슷해서 특수 분장인가 했는데, 어머니의 좋은 유전자는 확실히 유전된 것 같다.

2000년 아모레스 뻬로스

그리고 2012년.



위의 위가 어머니고 위의 사진이 바로 딸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고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어려운 것이 사랑이다. 물론 생활에 지치면 사랑이란 감정 또한 사치로 여겨질 수 있다. 사실 정말 감동적인 것은 바로 마르께스라는 거장의 선택이다. 어깨에 힘을 빼고 사랑의 이야기를 했다. 마치 옥따비오 빠스가 마지막에 사랑에 대한 에세이 이중불꽃을 쓴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남녀의 사랑, 저작거리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사랑, 하지만 그 사랑이 진짜라면 90년이 넘게 이어온 저주는 끝이 나고 세상은 조금 더 밝아지지 않겠는가? 

주인공의 말처럼 말이다. 


사족: 


     델가디나가 침대에서 엘 사비오의 기다리는 장면은 어디선가, 유럽의 어느 미술관에서 본 듯한 느낌이었다. 참 특이하게도 서면 소녀같고 누우면 성숙한 여인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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