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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황금사자 김기덕 감독 영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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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부터 김기덕 감독에 대한 평가, 평론 등이 영화에 못미친다고 생각했다. 내용도 모르면서 어려운 단어만 써서 어깨에 힘주는 사람들이나 극단적으로 비판하는 사람들, 거의 둘로 나뉘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쓴 글이 다른 이들과 얼마나 다른지 아니 얼마나 공감이 가는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김기덕 감독의 황금사자상 수상을 축하하는 의미로 이 글을 썼다. 


(아래의 글은 100% 개인의 기억에 의지해 쓴 글이니 당연히 오류가 있을 것이다. 또한 보지 않은 영화는 생략하였다.)

개인적으로 활 이전까지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그렇게 좋아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작이 나오면 꼭 찾아보려 했고 기왕이면 극장에서 보려 노력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아마도 무언가 들킨 느낌, 영화에서 악역으로 등장한 인물들에게서 보이는, 들킨 듯 보이는 내 모습이 그렇게 불편했기 때문인 것 같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우리 안에 내재된 속물근성이 희화화되어 등장함으로 인해 내심 찔끔하면서도 킥킥 거리를 수 있는, 약간 과장하면 해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웃음이 있다고 한다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전혀 웃음기가 없다. 어쩌면 역설적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은 가벼운 웃음이 아닌 깊은 상처처럼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어두운 면만 있다면 과연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계속해서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열린 판도라 상자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빛을 내는 것, 어두움 속의 조그만 촛불 같은 무언가가 있다. 그것을 역설적이라 하건 정말 리얼한 실제의 감정이라고 하건 쓰디쓴 한약의 마지막에 은은히 단 맛이 돌 듯 도는 그 무언가가 있다. 어쩌면 그것이 김기덕 감독 영화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데뷔작 악어는 조재현의 대사와는 다르게 바다의 왕자는 박명수? ^^ 물, 늪지에서의 왕자는 바로 악어이다. 뭍으로 올라온 악어는 그리 경쟁력이 없다. 순발력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걸음이 빠른 것도 아니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물로 돌아가야 한다. 영화에서 조재현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물 속에 담가놓는다. 자신 만의 소중한 비밀창고처럼 말이다. 김기덕 감독의 페르소나, 남자 주인공은 어떤 면으로 한국적이다. 뺨을 비비며 안아주며 감정을 마음을 나누는 법을 모르다. 그저 투박한 행위, 욕망의 배설처럼 보이는 행위 속에서 당사자만 은은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마음, 진정으로 서로 교감할 때만 가능한 남들은 모를 그런 마음들이 전달되고 서로 느낀다. 어떻게 하고 싶은데 어찌 할 줄 모르는 첫사랑의 실수와 후회 같은 그런 투박함. 여자의 마음과 남자의 마음, 그녀를 위해 정말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행위를 한다. 하지만 영화는 냉정하다. 뭍으로 올라온 악어는 더 이상 맹수가 아니다. 영화의 최고의 리얼리티는 바로 마지막 장면이다. 마음을 주었던 그녀와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보관한 바로 그 물속에 자신도 몸을 던진다.






갑으로 연결된 그런 마지막. 그런데 조재현의 입 속에서 기포가 솟기 시작하고 어찌할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삶을 향한 본능이 발현된다. 그리고 영화는, 아니 악어는 자신의 홈 그라운드, 물속에서 잠이 든다.

드디 라방이 출연한 것이 화제가 되었던 야생동물보호구역은 처음 봤을 때는 너무 프랑스 영화를 흉내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프랑스 빠다 냄새가 가득했으나 남한에서 소외된 자와 북한에서 소외된 자들이 프랑스에서 점점 더 바닥으로 치닫지만 그런 과정에서 사랑이란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아주 역설적이다. (여기서 풍산개의 예고 혹은 그 비슷한 냄새가 풍겨오기도 한다.) 야생동물은 보호해주지만 열외 된 인간은 보호해주지 않는다. 바닥에서 경험하는 사랑은, 미래에 대한 어떠한 계획도 없는, 집도, 예금잔액도 그 어떠한 것도 없는 상황에서는 사랑은 부질없는 것인가? 아니면 더 진실된 것일까? 악어와 야생동물보호구역은 닮은 꼴이다. 하지만 그 느낌은 사뭇 다른데, 악어가 짙고 강렬하다면 여운은 야생동물보호구역의 경우가 더 길게 남는다. 또한 포스터의 여배우, 가슴과 허리라인이 참 매력적이었다. 







파란대문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임질에 걸리는 장면, 안재모와 장항선이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의 임팩트는 대단했으나…. 묘하게도 여자들은 두 여인의 관계 탓인지 그리 기억하지 못했다
. 이 영화는 처음으로 김기덕 감독이 여성 사이의 동질감을 표현한 작품인데 여성의 내밀한 공감과 소통이 중요한 이 영화가 다분히 남성적으로 그려진 느낌이었다. 영화 자체가 굉장히 서둘러 제작된 느낌이라고 할까? 물론 열악한 환경이 더 주요한 이유였겠지만 말이다. 현재는 볼 수 없는 이지은이란 배우의 묘한 느낌, 약간 동안의 얼굴과 전체적으로 일본의 AV 배우가 연상되는, 귀여우면서 섹시한 모습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영화는 여대상과 창녀의 이질감과 동질성 그리고 성에 대한 감독의 해석을 엿볼 수 있는 영화이다. 오히려 전작들 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히 봐야 하는 영화이다. 김기덕 감독에게 여성과 섹스는 폭력과 남성성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특히 여성주의자, 페미니스트에게는 반감을 살 수 있으나 폭력적인 섹스를 혹은 그런 관계를 감싸 안아줌으로 해서 여성은 성녀가 되고 성모가 되고 남성의 구원이 된다. 이 개념은 사마리아, 피에타 등으로 연결되는데 그저 남성/여성으로 보면 아주 구차한 이야기가 될 수 있으나 구원에 대한 아니 더 작게 치유 혹은 위로에 관한 이야기라면 영화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 파란 대문 여인숙에 찾아온 강 같은 평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볼 만하다. 노파심에 그런 구원이 창녀에게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우리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프리 허그를 하며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위로가 되는 섹스는 없겠는가? 성인 중에서 그런 경험이 없다면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성을 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영화는 창녀마저도 가능한데 라고 생각할 때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이지은의 깨달음,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한 것은 진짜가 아니라고 깨달았을 때의 변화는 하나의 알레고리로 해석돼야 할 것이다.

 


섬

….. ~!! ….

그녀의 섬이라면 무인도라도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섬에 살아보니 가슴 떨리던 많은 것도 익숙해지고 그녀의 섬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치유가 아니라 그저 순간적인 위로였다는 것을 너무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는 너무 처절하게 사실적이고 동시에 상징적이다. 어떤 이는 김기덕과 장정일을 비교하기도 하는데 장정일은 현학적이고 상징적으로 동시에 권력적이다. 특히 장정일에게 섹스는 다분히 권력적인 것이며 그래서 SM 쪽으로 흘러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김기덕에게 섹스는 치유이고 위로이며 결과적으로는 구원이다. 당시 신인이던 김유석이 표현한 불안, 수컷의 불안은 아주 돋보였고 서정 그리고 나쁜 남자의 히로인 서원의 연기도 돋보였다또한 남자는 자살하기 위해 낚시바늘을 삼켰고 여자는 남자를 붙잡기 위해 낚시바늘을 자신의 질에 넣었다. 다시 꺼낸 낚시 바늘에 묻은 피가 마치 하트모양처럼 보이는데 이 또한 쉽게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노팅힐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너무 유명한 여배우라 사랑하기 어려울 것이라 말하는 휴그랜트에게 줄리아 로버츠는 나도 그냥 여자일 뿐이란 말을 한다. 사랑을 바라는 모든 이들은 그저 사람일 뿐이다. 물론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냐에 대한 대답은 서로 다를 것이다. 섬의 주인공인 그녀는 그를 위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스스로 타락한다. 마치 모성을 연상케 하는 사랑이다. 물론 집착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상대방의 의지와 상관없이 집중되고 그러다 집착하게 되고 거의 완벽한 이타성을 갖게 되는 것이 아마 사랑이 아닐까? 영화의 결말은 상징적이다. 남자는 결국 수풀 속의 섬으로 헤엄쳐간다. 아마도 그곳은 늪일 것이다. 수풀은 여성의 음모를, 약간 인위적이지만, 닮았고 마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에서 흑백 무성영화로 등장하는 작아지는 남자이야기처럼 결국 섬으로 들어간다, 혹은 사라진다. 섬은 이전 작품보다 단순하고 직설적인데 섬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칭 평론가들은 알 수 없는 말을, 그저 현학적으로 보이는 말을 반복한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섹스로 위로 받아본 적이 없습니까? (아마 없을 것 같다)


두 배우의 연기가 정말 좋았다. 


 

그리고 나쁜 남자, 아마도 대중적으로 성공한 김기덕 감독의 몇 안 되는 영화일 것이다. 또한 영화라는 것의 미학적 즐거움이라는 것이 익숙한 구조를 낯설게 보여주는 것인지 아니면 체험하기 어려운 상황을 보여주는 것인지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다. 또한 영화 섬의 남성버전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섬에 잠깐 등장하여 다방 티켓 걸이나 만만치 않은 청순 미를 선보인 배우 서원의 매력이 돋보인 영화이긴 하나 호 불호가 강하게 나뉘는 영화이기도 하다.깡패 새끼가 무슨 사랑이냐’라는 대사가 무색하게 영화는 깡패새끼에게 너무나 어울리는 사랑을 그려간다.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그녀를 자신이 가질 수 있게 타락시키는 것에 특히 많은 여성들은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영화가 더 공감을 가지려 했다면 타락한 여자를 남자는 어떻게 위로하고 치유할 것인가의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주 의도적이라 생각하는데 나쁜 남자의 남자는 섬의 여자와는 다르게 여자를 보내주는 것, 소유하려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위로였다고 혹은 그렇게 믿은 것 같다. 어쩌면 감독은 의도적으로 두 편의 영화에서 남자와 여자의 성향을 뒤집어 보여줌으로 해서 어떤 깨달음 아니면 조그만 해결책을 보여주는 것일 지도 모른다. 떠나가는 것이 남자라면 보내주는 것은 여자이고 남자는 배이고 여자는 항구라는 것이 통설이라면 그것의 반대는 치유와 위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여자의 타락은 남자 때문이었다는 것이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함정은 남자가 만들었다고 해도 그 함정에 빠진 이유는 100% 남자 때문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는 상황에서 보이는 어떤 교감, 위로 등의 감정은 과연 무엇인지 말하기 어렵다. 여자가 조각난 사진을 맞추고 그 사진에 자신의 얼굴을 넣는 것은 다분히 상징적인 장면이다. 로댕의 키스라는 작품으로 더 유명한 지옥에서도 함께하는 사랑,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의 사랑처럼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곳에서도 사랑은 피어날 수도 있는 것 같다.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사랑에서 섹스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종종 하는 사람이 있다. 개인적으로 그리 공감하지 못한다. 다만 이 영화에서 포주와 창녀의 사랑이 더욱 플라토닉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도 모르겠다.


단테와 버질 앞에 나타난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의 혼백, 아리 쉐페르작


사실 청순한 여자를 모텔로 끌어들이는 사랑을 꿈꾸는 많은 이들은 영화 나쁜 남자의 주인공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할 것이다. 또한 마음을 뺏어가고 혹은 영화의 표현을 빌리면 이제 완전히 타락하여 그가 아니면 마음 줄 곳이 없는데 자신을 떠나라고 하는 남자보다 나쁜 남자가 있을까 싶다.

나쁜 남자의 주인공 서원과 섬의 주인공 서정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것이 안타깝기도 한데 이것도 김기덕의 여인네들의 공통된 운명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더 아쉽기도 하다.

소통의 시작의 알리는 장면, 둘 사이에는 거울이 있다. 아니 그냥 유리라고 해야 하나...




 

사마리아

여기서 사마리아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그 사마리아로 누가 복음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과는 그리 관련이 없다. 요한복음의 마르지 않은 생수에 대한 이야기를 이끌게 되는 우물의 여인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이고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전통을 잇는 지역으로 남유대에 비해 외부에 침략을 많이 당했으며 그로 인해 지역 자체를 외세에 유린당한 창녀 취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요한복음의 사마리아 여인과 부정한 여인, 보통 너희에게 죄 없는 자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는 이야기로 더 유명한 부정한 여인의 이미지를 합쳐놓은 것 같다.


그래서 이 포스터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한여름의 매력이 돋보이는 포스터이다. 


아무튼 이 영화에서 당시 신문 사회면이나 뉴스에 종종 등장하건 원조교재를 하나의 소재로 삼았으나 성숙한 여인네들에게 관심이 있는 나로서는 그닥 눈길을 끌지 못했으나 한여름이라는 배우의 모습에서 일본의 만화가 이토 준지의 대표작 토미에의 이미지를 보았다. 아무튼 영화에서 그녀는 성녀이다. 스스로 바수밀다? 맞나? 아무튼 창녀이자 그녀와 관계한 모든 이들을 불교도로 이끌었다는 전설 속 인물의 현현으로 인식한다. 그녀는 파란대문에서 이어지는 남성을 구원하는 성녀이다. 곽지민은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할 듯 하면서도 이해하는, 파란대문의 여주인공들의 관계가 변형되기도 하고 발전되기 한 그런 관계이다. 영화는 비극을 담고 있다. 어쩌면 사랑의 비극이라고 할 수도 있고 관계의 비극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영화 속의 한여름은 수많은 남자들을 치유했거나 위로했다고 스스로 믿는다. 아마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중에 누구도 그녀를 위로하지 못했다. 죽음으로 향해가는 마지막 시간에서도 말이다. 그녀는 정말로 외로운 존재였다. 영화 속의 곽지민은 그녀의 친구를 이어 바수밀다가 되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사마리아 여인 남성위주의 현재의 이슬람과 그리 다르지 않았던 AD 1세기의 유대에서 그것도 남편이 여섯인 사마리아 여인이 된 것이다. 대가 없는 섹스와 화대를 돌려주는 과정을 통해 그녀는 아마도 남자만이 아니라 자신의 친구를 위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토 준지의 히로인 죽지않은 욕망의 화신 토미에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많은 남자를 위로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녀의 타락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을까? 아무튼 그녀가 수많은 남자를 위로했지만 그것은 동시에 그녀의 타락을 의미했고 그녀의 아버지에게는 엄청난 상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구원하고 그녀를 위로했을까? 그녀의 상처들을 치유했을까? 들려주는 음악, CD 플레이어에서 조그만 희망이 보이지만 그것이 첫 부분, 친구의 육체를 샀던 음악인과 겹치면서 희망은 희미해진다. 영화는 바수밀다와 사마리아 여인, 구원과 타락 등 상승과 하락의 이미지가 겹치며 묘한 긴장감과 애매함을 동시에 만든다. 사마리아가 수작인 것은 바로 이 상반된 이미지가 동시에 표현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소위 이야기하는 이상적인 여성, 침대에서는 창녀 평소에는 숙녀라는 점에 대부분 동의한다면 이것은 예술적 형상화가 아닌 현실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빈집

이 영화는 남성이 여성을 위로하는 영화이다. 전형성이 너무 강한 영화이며 사실 김기덕 감독은 남성이 여성을 위로하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등에는 잼병이 아닐까 싶다. 환상적인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사실적 묘사가 그 전과는 다른 점을 확연히 보여주는 영화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남편과 재희가 연기한 배역은 어쩌면 한 인물의 두 가지 성향이 아닐까부터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냐를 넘어서 두 캐릭터가 한 인물에서 화해하고 성장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 것은 아마도 개인적인 의견, 판단일 것이다. 이 영화가 구원이라는 테마까지 상승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남성이라는 한계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화 속에서 가시적 장면으로는 그리 상관이 없지만 감성적으로 재희의 역할은 나쁜 남자의 조재현, 이중 거울을 통해 훔쳐보는 조재현과 통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영화는 약간 순해진, 너무 실험적이지도 그리 강렬하지도 않은 스타일이었지만 특히 여성들의 공감을 얻어냈다는 것이 하나의 큰 수확일 것이다. 빈집이야 말로 김기덕 감독의 성장을 보여주는 작품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이다. 영화에서 활은 그 동안 표현해왔던 관계 혹은 사랑 혹은 그 모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에서활은 무기이면서 악기이다. 사랑은 기쁨이면서 슬픔이기에 사랑을 통해 함께하는 즐거움과 함께여서 느끼는 고독을 모두 배우게 된다. 물론 처녀성, 처녀혈에 주목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단순하게 사랑, 욕망, 상처 등을 함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관점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 그 이전에 영감님이 들려준 연주에서 그 양면성을 더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무엇보다 이 영화는 한여름이라는 여배우가 이끌고 간다. 그것도 변변한 대사 한마디 없이. 그녀가 더 성장하고 유명해지고 그랬으면 좋겠다. 또한 강은일의 해금연주는 정말 오장육부를 울린다.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라 그냥 말을 좀 아끼고 싶다.


개인적으로 더 좋아하는 포스터이다. 


 





비몽

비몽 또한 양면성을 보여주는 작품인데 그것도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보여준다. 나의 꿈의 너의 현실이라면 너는 과연 나의 꿈인가 아니면 내가 너의 꿈인가 내가 너의 현실인가 네가 나의 현실일까? 글쎄? 아마 가장 좋은 대답이 아닐까? 하지만 이 관계가 고통스럽다면 그 이 관계를 끊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과연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을까? 너를 죽이거나 아니면 내가 죽거나. 그런데 너를 죽여도 네가 내 기억에서 계속 산다면 난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를 죽이는 것이다. 나를 죽이면 너도 살고 혹은 꿈에서도 자유롭고 결국 나도 사는 길이다. 그러므로 비몽은 다분히 불교적인 영화이다. 장자의 나비꿈이 연상된다 해도 맥락적으로는 번뇌에서 벗어 나는 길, 금강경金剛經의 내용을 닮아있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들의 연상선상에서 이 영화를 보면 어떤 성숙함이, 누구를 구원하고 누구를 치유하고 위로하며 누구는 구원하고 치유하는 등의 관계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완전히 허문 영화이다. 나를 통해 나와 너를 구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말이다. 아무튼 이 영화는 적절하다. 혹은 적당하다.


 둘다 미남 미녀지만 이 포스터는 더더욱 아름답다. 



그리고 피에타, 다시 구원의 이야기일 것 같다.

또한 공감의 이야기, 최악, 인간 쓰레기 나쁜 남자보다 더 나쁜 남자, 감정이 메마른 한 마리의 동물이 다시 인간이 되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선한 인간도 악한 인간도 결국 인간이라는 같은 범주에 있다는 흑도 백도 결국 하나라는 메시지가 여기서 다른 방식으로 재현될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외국에 있어 언제 영화를 볼 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김기덕 감독의 개인적 성향, 나쁜 의미가 아닌 개인 성찰의 모습이 이제는 사회로 열리는 듯한 기분이다. 그래서 다음 작품이 더 기대된다.


 

영화 [시간]도 보긴 했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다시 한번 베니스 영화제 황금 사자상 수상을 축하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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