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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에서 핀 꽃 라틴재즈 8. 팔라디움Palladium & 맘보Mambo 첫 번째로 꽃 핀 라틴의 꽃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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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라디움은 뉴욕은 남동쪽 14번가 근처에 위치한 콘서트홀이자 나이트클럽이었다. 1000쌍이 커플이 동시에 춤을 출 수 있는 대형 클럽이었고 처음에는 백인들을 위한 장소였다. 하지만 재정적자로 인해 새로운 마케팅을 마련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일요일에 흑인과 라틴계의 사람들을 위한 이벤트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1948년에 드디어 처음으로 라틴 이벤트를 열게 되는데 이 이벤트로 인해서 클럽은 화려하게 비상한다. 보통 일요일은 교회에 가거나 쉬는 날이었던 백인들에 비해 일요일 오후에만 겨우 놀 수 있었던 라틴계들은 팔라디움의 이벤트에 열정적으로 반응하게 되고 일요일 오후 클럽 이벤트는, 현재의 기준으로 봐도 그리 현명해보이지 않지만 예상외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또한 50년대 맘보의 유행으로 인해 팔라디움은 날개를 달게 된다. 그러면서 일요일만이 아니라 매일 라틴음악을 틀었으며 곧 뉴욕의, 아니 미국 아니 전 세계의 라틴음악 중심지가 된다.



팔라디움 시대를 다룬 다큐이다. 


     팔라디움은 맘보의 성지와 같았고 팔라디움에서 거의 모든 맘보가 만들어지고 서로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맘보가 전 세계적인 유행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시 클럽댄스의 세계적 중심지였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팔라디움은 춤을 추는 클럽이었으나 사실 음악으로 더 유명했다. 뒤에 따로 설명하겠지만 춤으로 맘보는 특별한 스텝이 없는 자유로움을 특징으로 하지만 음악은 어떤 폼이 존재했다. 팔라디움의 뮤지션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정말 가히 충격적이다. 초기에 가장 유명한 밴드는 쿠바의 조그만 기타처럼 보이는 뜨레스Tres 연주가이자 밴드 리더였던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Arsenio Rodriguz 밴드였다. 까차오가 단손을 기본으로 해서 맘보를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손 몬뚜노son montuno와 클럽에서 즐길 수 있는 음악을 결합하여 진정한 의미의 맘보, 현재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맘보의 기본 형태를 형성한 사람으로 아르세니오를 꼽는다.

 

     하지만 역시 팔라디움하면 빅3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팔라디움도 최고의 인기였고 나오는 모든 뮤지션들과 밴드들이 정상급의 실력이었으나 그 중에서도 별중의 별이라면 역시 3, 마치토Machito 밴드Machito and His Afro-Cubans, 띠또 뿌엔떼Tito Puente 밴드Tito Puente orchestra 그리고 띠또 로드리게스Tito Rodriguez밴드였다. 이 밴드들의 경쟁과 인기는 현재 아이돌 못지않았다고 한다. 경쟁적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2밴드 이상이 같은 무대에 올라 마치 클럽 디제이 리믹스처럼 이 밴드의 연주가 끝나면 바로 다른 밴드가 연주하는 마치 쇼다운Show down스타일의 쇼도 자주 열렸고 이런 직접적인 경쟁은 맘보가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물론 경쟁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라틴 음악에 전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즉흥연주, 데스까르가Descarga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최고급 라틴음악의 뷔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라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춤을 추던 추지 않던 누구라도 꿈꾸는 꿈의 무대였던 것이다.

 


당시의 춤 스타일과 현재의 살사와 비교한다면 당시의 춤이 일단 예술성이 높다. 브로드웨이의 탑클레스 퍼포머들이 

놀러오는 경우가 많았고 현재 살사는 일반인들의 취미 수준이기 때문에 사실 비교가 어렵다. 

또한 음악적으로도 급격히 변하던 때이기에 춤도 정형성이 떨어지고 예술성 혹은 즉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어떤 평론가는 살사를 맘보의 화석이라고 한적이 있고 띠또 뿌엔떼 또한 살사에 비판적이었던 적이 있다. 

맘보는 당시 최신 유행이었고 대중적이기 보다는 예술적이었고 살사는 다분히 대중적이다. 

어떤 면으로 무용과 춤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팔라디움이 성공하면 할수록 역량 있는 밴드들과 뮤지션들은 팔라디움의 무대에 서게 되었다. 그 명단은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이다. 우선 라틴음악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셀리아 꾸르즈Celia Cruz가 보컬이던 소노라 마딴세라Sonora matancera, 쿠바음악의 대부 베니 모레Benny more와 그의 밴드, 라틴 음악의 여성 보컬로 꼽히는 라 루뻬La Lupe, 미스터 바바루Mr. Babalu로 더 잘 알려진 미겔리또 발데스Miguelito Valdes밴드, 쿠바 음악의 산 증인인 오케스트라 아라곤Orchestra Aragon 등 셀 수 없이 많은 라틴음악의 스타들이 팔라디움에서 연주를 했고 또한 연주를 하고 싶어 했다. 팔라디움의 성공 덕에 뉴욕에는 10여개의 라틴음악 라이브 클럽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또한 팔라디움 근처에는 버드랜드Birdland 오니스Onyx 쿠밥시티Cubop city 등의 재즈클럽들이 있었고 여기서 활동하던 뮤지션들에게도 팔라디움은 낙원이었다. 또한 종종 재즈 뮤지션들과 협연이 있기도 했다. 당시 최고의 재즈 뮤지션인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와 칼 재이더Cal Tjader 등이 팔라디움 무대에 올랐으며 라틴 뮤지션과의 인연은 그들의 음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당시 최고의 인기의 배우, 가수들이 팔라디움에 자주 들리던 사교의 명소였다.  세속적 명성, 음악적 완성도, 특유의 열정들이 하나로 모이면서 팔라디움은 뉴욕 최고의 명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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