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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서 역사로 라틴아메리카 개정판 8. 과만 뿌마의 기록이 시사하는 것들: 옥수수와 아메리카 대륙의 교류와 흑인노예

Latin Feel/역사 이야기

by Deko 2012. 10. 12.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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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만 뿌마의 기록은 현재 다양한 관점으로 연구되고 있고 무엇보다 문헌학적으로 당시의 뻬루와 남아메리카의 상황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텍스트이므로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특히 1600-1615년까지 자료를 수집한 것으로 짐작하는데 당시의 사회상과 남아메리카의 원주민 전통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1) 옥수수가 남아메리카의 주식主食이었다?

 

     일반적으로 옥수수는 아쓰떼까 섹터 혹은 멕시코 중앙 고원이 그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 남아메리카 또한 옥수수의 원산지라는 주장이 있다. 보통 메소 아메리카 지역의 주식은 옥수수이고 남아메리카의 주식은 감자라는 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과만 뿌마의 기록에 1년의 주기로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작물은 감자가 아니라 옥수수이다. 감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나 12개월을 소개하는 챕터에서 과만 뿌마는 1월에 씨를 뿌리고 5월에 추구하고 6-7월 대지를 쉬게 하고 수확물을 나누고 8월에 거름을 뿌리며 밭을 갈아 엎은 후 9월에 씨를 뿌리고 12월에 다시 수학하는 연간 1모작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감자와 당도가 떨어진 고구마 같은 유까에 대한 언급은 12월에 씨를 뿌리고 6월에 추수를 하는 것으로 두 번 언급이 나오나 6월에는 옥수수 농사와 함께 언급이 되어 있어 독립적으로 언급된 것은 12월이 유일하다.

     물론 잉까의 농업은 계단식 밭은 안데나스를 기본으로 하며 아열대 작물에서 냉대 작물까지 다양한 작물을 재배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또한 냉동/냉장 건조방식으로 통해 수년간 저장했던 것으로 현재 밝혀져 있다.

 

     옥수수를 기준으로 보면 아쓰떼까 지역이 문화적으로 더 앞서 있다 봐야 할 것이다. 현재의수경 재배와 흡사한 치남빠스를 이용하여 년간 4모작 이상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이고 특히 도시 거주민의 배설물을 거름으로 이용하여 도시 생활하수를 재활용하는 지혜도 있었다. 소화흡수를 돕기 위해 옥수수를 말린 후 갈아서 섭취했으며 고추를 비롯한 기타 곡식이나 향신료 또한 갈아서 조리했다옥수수를 갈아 가루를 만든 후 이것을 현재 또르띠야 형태로 반죽을 해 굽거나 쪄 먹었다는 것은 재료의 풍미맛과 향은 줄어들 수 있으나 이를 통해 다양한 조리방식으로 응용이 가능하므로 문화적으로는 상당히 다양하며 발전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옥수수를 재배하여 추수한 후 알갱이를 따로 나누고 이를 건조시키게 되면 일단 보관과 운반이 용이하다. 또한 이것을 갈아서 가루로 만든 후 반죽을 하여 조리한다는 것은 상당히 복잡한 과정이다이것은 아쓰떼까의 음식문화가 상당히 발달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9월 다시 옥수수 씨를 뿌리는 모습



1월 옥수수 밭에 김을 메는 모습



5월 추수하는 모습



6월 감자의 수확, 그리고 옥수수밭은 쉬게 하여 지력을 회복하게 했다.



8월 밭을 가는 모습, 이후 9월에 다시 씨를 뿌린다.




     하지만 이에 반해 잉까 지역에서 옥수수를 소비한 방식은,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굽거나 찌는 것 이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음식 문화의 발전이라는 측면이 어떤 작물의 원산지가 어디인지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야의 신화에서 볼 수 있는 옥수수 숭배사상이나 기타 아쓰떼까, 떼오띠우아깐의 구조물에서 볼 수 있는 옥수수 토템은 메소 아메리카에서 옥수수라는 작물이 차지하는 문화적 비중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남아메리카에서 옥수수 관련 토템을 볼 수 없다. 이런 전체적인 상황은 옥수수의 원산지가 남아메리카가 아니라 메소 아메리카임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남아메리카에서 옥수수가 주식처럼 소비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은 메소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에 교류가 있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접촉이 있었던 구체적 장소, 그 범위, 지속기간 등 아무것도 현재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이렇게 추측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구황작물로도 잘 알려진 감자의 경우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는데 이 감자가 메소 아메리카에 소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토란처럼 작은 토종 감자는 삶아서 껍질 채로 소금만 약간 찍어 먹어도 아주 단백하며 은은하게 단맛도 느낄 수 있다. 또한 감자 고구마 옥수수는 16-17세기 중국과 일본 그리고 17세기 우리나라에 들어와 흉년으로 고생하는 많은 이들은 살린 바 있다. 과만 뿌마가 책을 쓸 그 즈음에 이미 전 세계에 퍼진 것이다. 메소 아메리카의 마야나 아쓰떼까의 입장에서도 감자는 상당히 매력적인 작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메소 아메리카에서는 감자가 재배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국 메소 아메리카의 한 세력이 남아메리카의 문명 중 하나와 접촉해야 하며 서로 무역을 통해 옥수수가 남아메리카에 전해졌고 남아메리카의 작물 등 또한 그들에게 전해졌으나 그들이 메소 아메리카의 다른 문명, 마야나 기타 다른 문명에 전해주지 못했다고 가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어쩌면 옥수수는 AD700-900년까지 메소 아메리카에서 붕괴된 떼오띠우아깐, 싸뽀떼까 그리고 마야의 숨겨진 이야기를 전해주는 지도 모른다. 당시 남아메리카에서는 띠와나꾸 문명과 와리 문명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치모르 문명이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AD700년부터 900년까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좀 더 좋은 환경을 찾고자 했다면 남아메리카의 문명들을 제외하면 현재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다른 대안은 없다. 아마 만남이 있었다면 바로 이때일 것이며 이후 AD1100년경 갑자기 남아메리카의 모든 문명이 붕괴되고 비슷한 시기에 당시 메소 아메리카의 맹주였던 똘떼까 붕괴하면서 약 50년에서 100년 동안 아메리카 대륙의 주도적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다. 아마도 교역 상대를 잃어버린 집단 또한 마찬가지로 붕괴되거나 다른 지역, 다른 세력에 흡수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메소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연결한 세력이 마야 문명의 일부였다고 가정하면 이들이 중미지역으로 이주했고 선박을 이용하여 남아메리카의 문명들과 교역을 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또한 AD1150년에 성립한 치모르 문명의 경우 주요 지배층이 바다를 건너 온 외래인으로 밝히고 있어 메소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연결하던 세력이 스스로 정착하여 새로운 왕조를 연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현재 치모르 문명을 비롯하여 뻬루의 북부, 에콰도르의 남부 지역에서 대대적인 발굴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고 태평양에서 밀려 온 모래로 인해 상당히 많은 유적들이 손상도지 않은 상태로 발굴되고 있다. 치모르 문명에 대한 연구를 통해 어쩌면 메소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관계의 비밀이 풀릴 수도 있을 것이다



청색으로 표시된 곳이 치모르 문명의 섹터이다. 뻬루 북부에서 콜롬비아 남부까지 이어진다. 붉은 색으로 표현한 지역이 마치 만(bay, 灣)과 같아서 배로 이동이 용이한 지역이다. 사실 해안의 가까운 바다를 통해, 태평양과 카리브해 양방향을 통해 메소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에 교역이 있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발굴된 담벼락 위에 보이는 것이 쌓인 모래이다. 태평양에서 파도에 의해 밀려온 모래가 유전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 보호막이 되어 유적의 손상이 거의 없다. 앞으로 찬찬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 의해 치모르 문명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달라질 가능성도 있다.





     2) 17세기 초에 이미 흑인 노예들과 흑인과 백인의 혼혈인 뮬라토가?

 

      과만 뿌마의 삽화에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뮬라토와 흑인 노예의 존재이다. 쉽게 원주민 반란이 아직 토벌되지 않은 그런 상황에 흑인 노예들이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플랜테이션 농업이 시작된 것을 산업혁명이 일어난 18세기 중엽으로 보기 때문에 이때 유입된 흑인 노예들은 플랜테이션 농업을 위한 것이 아니다. 흑인 노예들이 유입되었다는 것은 상당한 노동력이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주민들을 아무리 착취해도 모자란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흑인 노예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흑인 노예들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바로 은광이었다. 물론 에쓰빠냐인들의 꿈은 황금, 금광이었을 테지만 현실은 은광이었다. 1500년 무렵 시작하여 1650년까지, 다시 말해 과만 뿌마가 책을 쓸 즈음까지 약 만 육천 톤 이상의 은을 캐냈다. 1600톤의 은괘를 상상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후에도 매년 200톤 이상의 은이 채굴되었다. 다시 발달한 도시들은 현재 콜로니얼 스타일 도시로 현재는 관광지로 유명하다. 멕시코의 과나후아또 주에 발달한 지하도, 지하 수로 등은 은을 운반하기 위해 건설된 것이다. 하지만 넘쳐나던 은도 인간의 욕망을 당해내지 못했다. 은광들이 폐쇄되기 시작했고 이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대농장주를 비롯하여 인간의 욕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이것은 원주민과 흑인 노예에 대한 착취로 이어졌다. 두 번째, 광산이 폐광되자 수많은 원주민들과 흑인 노예들은 도시 빈민으로 유입되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신대륙 드림, 라틴 버전 아메리칸 드림이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의식의 상징이었다. 넘쳐나는 빈민들과 구걸하는 거지들이 거리에 가득했다고 한다. 물론 현재에도 이런 비슷한 모습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수도에서 볼 수 있긴 하지만.

      이런 위기는 플랜테이션 농업이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상쇄되었다. 신대륙은 은이 아니라 설탕, 담배, 커피 그리고 사탕수수를 발효하고 증류해 만든 럼주 등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더 많은 노동력, 결국 더 많은 노예들이 필요했고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잡은 노예들을 아메리카 대륙에 그리고 아메리카에서 플랜테이션 작물을 유럽에 파는 삼각무역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당시 대서양은 황금알을 낳는 바다였다


대농장주에게 핍박받는 흑인 노예들


달걀 2개가 없어지자 부왕청에서는 흑인 노예를 고문했다.


부왕과 메스티소, 뮬라토 그리고 원주민 지도자의 식사 모습. 당시 위계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려지지 않은 대다수의 원주민들과 흑인노예들이 당시 사회 최하층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채굴된 엄청난 은은 전 세계를 바꿔놓았다. 유럽에서는 인플레이션 1200% 이상이었던 가격혁명이 일어났고 이 가격혁명은 구매력 상승으로 이어지면서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아시아 지역도 이 영향의 예외는 아니었는데 돈 자체가 은으로 바뀐 청나라의 지정은제 또한 아메리카 대륙의 은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차를 마시는 문화가 발달하면서 본 차이나라는 명칭으로 더 알려진 중국산 자기들이 유럽의 상류층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아이템이 되었고 사람들은 더 질 좋은 옷을 더 맛있고 단 음식을 원하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고 초콜릿을 먹는 전통 또한 17-18세기에서야 유럽에서 생긴 전통이며 이 자체가 새로운 시대, 전과는 구분되는 풍요로움이 있었던 시대였다. 현재의 유럽 문화는 바로 이 시기에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하지만 산업혁명 당시 영국의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은 20세 미만이었으며 공해 등으로 인해 각종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산업혁명 당시 노동자들의 환경과 삶의 질을 흑인 노예와 원주민들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은은 전 세계를 바꿔놓았다. 그 정도의 은이 대규모로 채굴되기 위해선 엄청난 규모의 광산산업이 발달해야 했을 것이다. 이 세계를 바꾸어놓았던 엄청난 은이 엔꼬멘데로라고 부르는 대농장주들의 부였고 동시에 권력이었다. 이를 위해 초기부터 흑인 노예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전 세계적 변화를 통해 근대라는 시대가 열렸으며 산업혁명이 가능했다. 그 모든 것의 동력은 바로 아메리카 대륙의 은이었다. 그 이전까지 실크로드로 대표되는 유라시아 대륙 안에서의 무역활동은 아메리카 대륙이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로 세계화globalization로 보긴 어렵다. 하지만 16세기부터 시작된 근대화 과정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어떤 세력이 이 결실을, 이 열매를 독차지 했는지도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하겠지만 이런 과정이 가능했던 동력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과만 뿌마는 흑인들의 강제적 이주, 원주민과 흑인 그리고 백인들의 혼혈 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원주민 전통을 회복하고 공동농장을 통하여 불평등을 해소해보려 했던 과만 뿌마의 입장에서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거나 그 엄청난 물길을 막거나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격동의 시기, 갑자기 생기는 광산도시들, 그리로 몰리는 인간의 욕망들, 엄청난 양의 은 그리고 간간히 발견되던 금까지. 그런 모습이 현재 아마존 밀림에 고의적으로 불을 지르고 소를 키울 농장을 만들거나 또 다른 광산을 만드는 인간의 욕망과 얼마나 비슷한지, 과만 뿌마의 삽화를 통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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