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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서 역사로 라틴아메리카 개정판 5. 잉까 건축의 미스터리가 풀리다? 아니 적어도 외계인은 아니다.

Latin Feel/역사 이야기

by Deko 2012. 10. 7.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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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잉까 건축의 비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벽돌도 아닌 자연석을 가공하여 만든 건축물이 너무나 견고하고 튼튼하여 현재까지도 안정적이라는 것과 두 번째는 이 자연석이 경우에 따라 100톤이 넘는 경우도 있는데 수레를 비롯한 기타 운반을 위한 도구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바위들을 운반했고 쌓아 올렸다는 것이다. 사실 잉까 건축물의 아름다움이 무엇보다 먼저 언급돼야 하겠지만 불행히도 현재 남아있는 잉까의 건축물은 일부분이고 온전하게 남아있는 건축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마추핏추를 비롯하여 삭사우만 요새 등 거의 모든 유적들이 본연의 모습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형태로 쉽게 우리가 놀라고 간간히 감동을 받는 잉까의 건축물은 잉까 건축의 정수가 아니라 그저 잉까 문명의 흔적이다. 또한 꾸스꼬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지역의 잉까 유적들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잉까 문명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를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면도날 하나 들어가기 어려운 잉까의 구조물의 비밀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규모가 작을 경우 나무 격자나 나무 못을 바위 틈에 넣은 후 물을 넣어 나무가 물에 불어나면서 바위가 갈라지게 하여 바위를 채취한 다음 그 모습과 각도를 유지하면서 돌 망치로 다듬은 후 물을 뿌리면서 바위 표면을 갈아내어 이동할 준비 및 현장에서 조립될 준비를 한다. 현장으로 이동한 후에 다시 돌을 다듬어 쌓아 올린 것으로 본다. 규모가 큰 바위의 경우 주변에 나무를 쌓고 불을 지른 후 다시 물을 뿌려 식히고 다시 불을 지르는 과정을 통해 바위가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틈이 벌어지면 나무 격자들을 꼽아 작은 바위의 경우와 비슷하게 잘라내고 가공했던 것으로 본다. 이 과정에 마치 레고의 조각처럼 서로 맞춰질 수 있는 홈을 만들어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맞춰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사실 꾸스꼬에 남아있는 잉까의 구조물을 보면 돌 하나하나가 약간 볼록 튀어나와 음영이 생기게 되어있다. 이 매끈한 돌의 표현은 깎아서 다듬은 것이 아니라 갈아서 다듬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잉까의 구조물은 후기로 가면 갈수록 자연의 원석을 모양을 이용하기 보다는 마치 현재 사용하는 벽돌처럼 같은 규격으로 다듬어서 사용하게 되었다. 특히 잉까의 마지막 수도였던 빌까밤바나 와누꼬밤바의 구조물에서 삭사우만 요새와는 다른 변화, 혹은 발전을 확인할 수 있다. 미적으로도 아름다우면서 구조적으로 복잡한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거석이 필요하다기 보다는 다루기 쉬운 작은 돌이 더 효과적이다. 특히 마추핏추의 구조물을 보면 거석이 아닌 작은 바위와 돌도 얼마나 섬세하게 다듬어 사용하였고 이것 또한 얼마나 예술적으로 쌓아 올렸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안정적인 지반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건축물의 하중에 대한 계산을 통해 거석은 건물의 아래에 사용하고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돌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건축물을 만들었다.


깍어서 만든 것과 갈아서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미스터리해 보이지만 거석은 밑에 위에는 약간 작은 돌을 올린다.



     사실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지역의 구조물에 대한 여러 정보가 이미 있으므로 잉까 지역의 구조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것은 그리 큰 미스터리가 아니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최대 100톤 이상으로 보이는 거석을 어떻게 운반했는가 하는 것이다. 수레를 비롯한 기타 이동을 위한 도구도 발달하지 않았고 소나 말 등을 이용할 수도 없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는 도르래, 기중기 등도 없었다. 그래서 외계인 혹은 외부의 존재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도 존재한다. 물론 UFO를 타고 먼 우주에서 온 외계인이 바위와 돌로 구조물을 만들 이유가 무엇인지도 확실하지 않으며 철기를 비롯한 기타 도구의 사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도 의아한 부분이다. 사실 더 이상한 것은 남아메리카의 문명에 나타나는 공통점, 지배층의 하늘 혹은 외부에서 온 세력으로 자부했다는 것, 쉽게 천자天子 혹은 천손天孫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자신들 외에 또 다른 외부세력, 외계인 세력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해결되기 어려운 구조이다. 만일 외계인과 접촉이 있었다면 스스로 선민사상을 갖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여기에 우리의 선입견이 작용한 것 같다. 사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만들기 위해 사람과 동물, 말이나 소가 끌고 통나무를 이용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바퀴를 이용하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하중이 높으면 높을수록 마찰력이 없을 때 힘의 균형이 안 맞게 되면 굴러 떨어질 가능성이 높고 끄는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힘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다. 아마 병역의 의무를 마친 남성들은 추계 춘계 진지공사 등을 통해 오르막에서 리어카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다들 경험했을 것이다. 하중이 높으면 높을수록 마찰력이 거의 없어 잘 굴러가는 리어카는 편리하지만은 않다

현재 상상되고 있는 이집트의 거석 운반 방식



     이런 우리의 선입견을 깨고 합리적인 가설을 발표한 사람이 있다. 건축학자이자 고고학자인 빈스 리Vince lee는 약 30년 정도 잉까의 건축물을 연구하고 기타 유적지들을 탐방하고 조사한 학자이다. 그가 발표한 가설은 아래와 같다.( 그의 책 PUCUYOC REVISITED: An inca marvel decoded, The buiding of Sacsayhuaman, and the papers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바닥이 평평한 판옥선은 속도는 상대적으로 느리지만 다양한 방향으로 회전하거나 이동하기 쉽다. 현대에 사용되는 수륙양용 탱크나 장갑차의 경우도 판옥선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



     한 두 명이 끌 수 있는 규모의 작은 바위의 경우 먼저 바닥을 우리나라 판옥선처럼 다듬어 마찰력을 줄이고 원활하게 끌고 갈 수 있도록 하고 돌의 규모에 따라 모래를 깔기고 하고 자갈을 깔기고 하고 둥그런 돌멩이를 바닥에 깔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빈스 리의 가설에 의하면 더 큰 규모의 바위는 철길과 비슷한 나무길을 만들어 이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나무길은 철길과 비슷하며 차이점은 가장자리가 길게 나와있는 것이 다르다. 어떤 면으로 사다리와 흡사하다고 할 수 도 있다. 이렇게 길을 만든 후에 기차를 연상케 하는 사다리를 바위의 규모에 맞게 만든 후 그 위에 바위를 올린 후 옆으로 튀어나온 부분에 나무를 끼워 넣어 지렛대의 원리로 밀어내면서 운반했다는 것이다. 마찰력을 줄이기 위해 윤활물질을 뿌렸던 것으로 보는데 옆으로 늘어선 인부들이 두 그룹 혹은 세 그룹 등으로 나누어 분업처럼 일을 했다면 상당히 빠르게 움직였을 것이다. 이것은 사실 배에서 노를 젓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방식이다. 차이가 있다면 물에서가 아니라 나무로 만든 길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차이가 있다. 또한 회전 등의 방향 전환에도 용이하며 무엇보다 오르막을 오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으며 무엇보다 위험요소가 거의 없다는 장점이 있다. 지렛대로 사용하기 나무를 홈에 꼽아두면 바위가 미끄러질 가능성이 상당히 적기 때문이다. 사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만들기 위해서도 글림대인 나무 부목을 깔고 지나가면 다시 가져와 깔고 하는 등의 소모적인 작업을 했을 것이라 상상하는 것은 이집트인들의 수준을 너무 낮게 보는 것일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이런 방식이다. 나무로 만든 사다리형 길도 상황에 따라 증축이 가능하다.


어찌보면 불편해보일 수도 있는데 익숙해지면 상당한 속도로 작업을 할 수도 있다. 일부 인류학자 고고학자들은 이것을 썰매Sleigh방식이라 부르기도 한다.


과만 뿌마가 쓴 [새로운 연기기와 좋은 정부] 중 거석을 운반하는 그림 이 책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하게 서술할 것이다.



      현재도 띠띠까까 호수 주변의 원주민들과 뻬루의 원주민인 께추아족이 전통적으로 무거운 물건을 나를 때 이와 비슷한 방식을 사용한다고 한다. 특히 띠띠까가 호수 주변 원주민의 경우, 그리 크지 않은 카누에 백여 킬로의 바위를 운반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지만 몇몇 열혈 인류학자들은 직접 실험을 했고 성공했다. 빈스 리의 가설은 바로 이 방식, ‘물에서의 이동방법을 육지에서도 재현할 수 있을까’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 그의 추론과 가설의 합리성이 인정된다. 수레가 발명되고 말이나 소가 수레를 이끈다고 해도 물류 이동 속도와 규모에서 선박을 이기지 못한다. 수나라의 양제가 대운하를 건설하여 앙쯔강과 황하 등을 비롯한 여러 강을 남북으로 연결한 것도 바로 선박을 통한 물류의 이동의 힘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잉까는 이런 해운 혹은 수운을 육지에서 재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선입견과 무지가 합리적으로 극복될 때, 어떤 새로운 쾌감이 있는 것 같다.

 

     잉까 문명이나 기타 고대문명에 대한 다양한 선입견과 미스터리가 있고 그에 대한 황당한 가설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우리의 무지와 선입견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외계인이 UFO를 타고 와서 레이저와 흡사한 빔으로 돌을 다듬고 자신들의 기술로 거석을 운반하고 그것을 구경하는 원주민들의 모습과 나무길을 통해 노를 젓듯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돌을 밀어 운반하고 돌을 깎아내고 물을 뿌려가며 갈아내고 다시 지렛대의 원리로 돌을 올리는 모습, 이 두 모습 중에 어떤 것이 더 사실적인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무튼 이로써 잉까의 구조물들은 신비의 커튼을 걷어내고 조금 현실적으로 친근해지는 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끈 하나만 있으면 정삼각형, 정사각형, 직사각형, 원 등 다양한 기하학적 문양을 그려낼 수 있다. 이것은 기하학의 기본이 된다. 아무리 복잡한 문양, 구조물도 시작은 이와 같다. 문명의 발달, 기술의 발달이 인간 상상력의 발전까지 담보해주는 지 모르겠다. 천 년이 넘은  10세기에 만들어진 인도의 찬드 바오리 우물은 여전히 지금도 보이는 이들에게 까마득한 충격을 준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스스로 상상력을 억제하는 자기비하에 빠진 것이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며 현대 기술 문명과 분업이라는 것이 전체적인 인류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퇴보시킨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인도의 찬드 바오리 우물이 주는 기하학적 충격, 시각적 충격은 상당하다. 보통 이런 경이로운 발견, 발명, 건축, 예술 등은 전설이 된다. 찬드 바오리 우물도 귀신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중세의 귀신과 현대의 외계인이 서로 치환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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