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일부 지역에 위치했던 가야는 변한의 후예로 알려져 있으나 김수로왕의 설화 등으로 미루어 보면, 마한이 백제에게 멸망 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외부 해상 무역세력이 유입되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현실성이 있다. 가야는 그저 잠시 우리나라 역사에 존재한 것처럼 느껴지나 고려와 조선의 경우와 비슷하게 약 500년 이상 존재한 국가(혹은 국가연맹)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변한은 12개의 소국의 연합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가야 또한 이와 비슷한 숫자의 부족국가 연합이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가야는 철 무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요서의 한군현에서도 가야의 철을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가야는 중국, 일본 및 기타 지역과 철을 교역하며 기타 물품 등을 거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할 무렵, 철광석을 수출하고 제철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의 산유국 이상의 위상을 말하는 것이다. 국가의 힘은 그 영토의 크기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가야의 주된 교역물이 철 뿐이었다면 당연히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는 12개국 적어도 10개국 이상의 부족 국가 연합으로 남아있었다. 현재 함안 지역에서 아라가야(阿羅伽倻)의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유물의 대부분이 상당히 수준 높은 자기들이었고 이 자기가 바로 아라가야의 주된 교역 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는 18세기에도 유럽에 수출되기도 했고 특히 본차이나라는 중국식 자기는 현재도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다시 말해 자기는 사치품으로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부가 가치 높은 상품이었다.
현재 가야의 다른 중심지역들에서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지만 가야의 소국들은 저마다 자신들만의 특산품이 있었으며 그것을 중심으로 서로 자율적으로 교역하는 장사꾼-장인-교역선을 운영하는 선원집단의 연합체였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가야가 이런 집단이었다면 중앙집권 국가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서로 돕는 우호적인 관계만 유지하며 자신들의 사업을 스스로 잘 운영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굉장히 발전된 지방자치제였다고 볼 수 있다. 각 무역의 주체들이 자율적으로 움직일 때 최대의 이윤을 올릴 수 있는데 중앙의 권력에 모두를 복속시키는 것은 아주 아둔한 생각일 것이다. 또한 국가의 개념도 근대적 국가와는 다르다. 국민을 지키고 국민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국가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가야는 상당히 근대적 구조의 국가 연합체 혹은 자유주의적 무역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알 고 있듯이 당시 여러 소국이 있었고 여러 소국들이 정복당하기 시작하는 쉽게 제국의 시대에 가야는 시대 조류에 역행하였다.
물론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5개에서 7개의 가야가 더 있다. 이 들 또한 자신들의 특산품과 주여 무역 대상국이 있었을 것이며 서로 겹치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다. 쉽게 적대적 관계의 국가들과 모두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이 높다.
개인적으로 가야의 쇠락의 이유는 아마도 교역국들이 스스로 철광석 산지를 찾아내기 시작했고 장인들을 빼가 비슷한 물품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야에 주목해야 할 것은 그 구조가 상당히 근대적이고 자율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방자치제와 흡사고 전통적 자유주의 경제 체제와도 흡사하다.
물론 여기서 가야가 마야와 무슨 관계인지 의아해할 이들이 많을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문명과는 달리 마야는 100여개의 부족국가 혹은 도시국가 연합이었다. 각 도시들은 저마다의 특산품이 있었고 이를 서로 교역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가야처럼 말이다. 이렇게 자율적인 무역망을 가진 국가 연합체가 하나의 제국으로,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제국으로 변해갔다면 어쩌면 한순간 짧은 제국의 영화를 누리고 결국 망해버렸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이 관점으로 보면 제국의 모든 상황, 식량을 비롯한 기타 모든 상황을 중앙에서 통제했던 잉까와 마야는 서로 상반된 분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마야는 신자유주의적인 무역집단이고 잉까는 사회주의 복지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재의 기준과 딱 맞는 것은 아니다.
마야의 지도, 지도 아랫부분에서 시작되어 점점 북상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전성기는 중심지는 바로 중앙의 약간 큰 점으로 표시된 지역들이다. "신화에서 역사로 라틴아메리카"의 마야 챕터에서 칸쿠엔에 대한 부분을 참조하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약 100여개 이상의 도시 국가 연합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는 유까딴 반도쪽으로 만이 아니라 중미, 즉 지도의 오른 쪽으로도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고 고고학적 발굴도 이루어지고 있다.
10세기경 마야문명은 그들의 전성기를 뒤로 하고 그들이 활동하던 지역에서 사라진다. 멸망이란 표현이 어울릴 정도이다. 그리고 유까딴 반도에서 그들은 재기하게 되는데 그 이후로 400년 이상을 유지하였으나 그 규모가 달랐다. 100여개의 도시국가 연합이었던 마야는 유까딴 반도로 이주한 후 최대 30개의 도시국가연합을 넘지 못하고 그 규모로만 보면 전성기 마야의 1/3, 마치 우리 역사에서 후백제와 비슷한 인상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2/3는 어디로 갔을까? 마야는 원래 중미지역의 태평양 연안, 남서쪽에서 시작되었고 점점 북상하면서 전성기를 누렸고 유까딴 반도로 이주한 이후, 멕시코 만과 카리브 해 연안지역, 상대적으로 북동쪽 지역으로 이주한 것이다. 그러나 마야가 마야 연합 내에서만 교역을 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중미지역, 더 남쪽으로 이주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사실 현재 중미의 정글지역에서 다양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상당한 규모의 피라미드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현재까지 확실한 조사결과가 발표되지는 않았다. 10세기경 과연 마야지역에 어떤 자연재해 등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마야의 상형문자와 중미 정글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어떤 해답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후백제와 비슷한 느낌의 유까딴 반도의 마야 또한 견훤을 왕건 못지 않은 영웅으로 간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저 쉽게 보면 안 된다. 그들은 똘떼까와 아쓰떼까의 침입을 물리쳤고 독립을 유지한 것으로 보이며 특히 스페인군과의 전투에서는 패하지 않았다. 그저 천연두와 같은 유럽산 전염병에 무릎을 꿇은 것뿐이다. 마야인의 기질이란 자유주의적 시민과 비슷하다.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절대 굴복하지 않았던 그들은 기상은 우리 역사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것이며 그 자체로 시사하는 것이 적지 않다. 그들은 지금도 유까딴 반도의 정글에서 수천 년간 이어온 그들의 언어를 지키고 그들의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다. 아마 마야 최고의 미스터리는 지구의 종말을 예언하는 등의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스페인과 그리고 그 이후 현대의 멕시코와 접촉을 하면서도 자신을 지켜낸 바로 자신들일 것이다.
다시 부언하면 마야와 가야는 자유로운 무역공동체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중앙 집권적인 국가, 혹은 제국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역사의 발전이라는 생각은 선입견이라는 것을 세겨야 할 것이다. 아무리 복지국가라 해도 중앙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며 개인의 자유를 억합하면 문제이고 아무리 자유로운 무역 공동체라해도 각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면 이것도 문제이다. 결국 이 둘 사이에 얼마나 균형을 이룰 수가 있는지가 제일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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