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신화에서 역사로 라틴아메리카 개정판 3. 그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조각상 사이의 공통점

Latin Feel/역사 이야기

by Deko 2012. 10. 5. 06:23

본문














    우리민족의 흔적을 확인하는 데에 가장 요긴한 증거가 바로 연자방아라고 한다. 말이나 소가 절구 위에 있는 돌을 끌어서 돌려 곡식을 빻도록 만든 방아인데, 동네의 물레방아도 여러 가지 이유로 중요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이 연자방아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특히, 만주지역에서 우리 민족의 흔적을 확인하는데 연자방아만큼 요긴한 증거물은 없다고 한다. 문화는 이렇게 흔적을 남긴다. 물론 다른 문화와의 교류 혹은 경쟁 과정에서 도태되기도 하고 살아남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도 그리 급작스럽게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 중에서도 미적 감성은 상당히 고유한 것으로 한번 전통으로 사회적 용인을 받게 되면 이것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물론 현재 유행에 아주 민감한 사람들에게는 약간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말이지만 가시적인 패션에서 변화의 속도가 느껴진다고 해도 어떤 사람이 미인이고 미남인지에 대한 기준은 그렇게 쉽게 혹은 극단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물론 미적 감성은 인식에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표현하는 창작의 작업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친다. 미적 의식이 흡사하다는 말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예술적인 부분은 차용하거나 받아드렸다는 말이 된다. 물론 우연히 비슷한 스타일의 무언가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인간이라는 보편성 아래에서는 분명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여러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 있다면 우리는 이 정보를 해석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해석의 과정에는 오독의 가능성이 언제나 숨어있다.



           1) 똘떼까(뚤라)의 거석상과 띠와나꾸의 거석상


똘떼까의 석상


띠와나꾸의 거석상

  * 특히 발을 주목해서 보면 두 석상의 공통점을 느낄 있을 것이다



           2) 이스터 섬의 석상 그리고 돌하르방과 장승


아랫쪽으로 살짝 보이는 사선이 바로 팔이다. 물론 전체를 표현한 모아이는 초기의 것으로 

후대로 가면 수록 점점 상징적으로 변하고 머리만 남게 된다


띠와나구 석상의 손의 모습, 모아이의 손의 모습 그리고 돌하르방의 손이 비슷하다.

물론 그렇다고 직접적 영향관계가 있었다 단언할 수는 없다. 아들을 원하는 이들이 돌하르방의 코를

훼손시켰고 게다가 측면에서 보는 일이 별로 없지만 원래는 저런 모양이다


학자에 따라 장승을 거석상의 원형으로 보기도 하고 가장 최종적 모습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것과 상관없이

거석상들의 공통점과 상관없이 의미, 수호신 혹은 그와 비슷한 의미라는 것은 확실한 공통점인 같다



           3) 확연히 구분되는 마야의 석상


일단 크기가 사람과 비슷하거나 2미터 내외이다. 또한 표현 자체가 상당히 다른, 미학적으로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측면과 뒷면에 상형문자가 세겨져 있으며 실존인물, 수호신이 아닌 

실존 인물을 기념하기 위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띠와나꾸 문명은 AD200년경에 성립했으며 똘떼까 문명은 AD968년 경에 성립했다. 현재까지 두 문명 사이 어떠한 관계도 확인된 것이 없다. 800년정도의 시간적 차이 그리고 지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석상 사이의 공통점은 간과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원통으로 돌을 다듬은 다음 석상을 제작했다는 것과 기타 신체를 처리한 방식 등은 같은 문명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또한 이것이 일상적 장소에 그저 장식품으로 설치된 것이 아니라 신전, 피라미드 부근에 만들어진, 종교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사회적 역할이라는 측면으로 보면 거의 같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똘떼까의 석상이 4-5미터 정도이고 띠와나꾸의 석상은 7미터 이상이다. 석상의 크기는 아마도 당시의 제사장 혹은 지배자의 권력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규모는 띠와나꾸의 석상이 더 크지만 섬세함, 미적인 면에서는 똘떼까의 석상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띠와나꾸의 석상은 규모는 더 크지만 하나의 거석을 깎아서 만든 것으로 보이고 똘떼까의 경우 보통 3-5 단계로 나누어 제작하고 하나로 합친 것으로 보인다. 마치 잉까의 건축물처럼 각 부분은 맞춤 격자가 있어 레고의 조작처럼 딱 들어맞는다.

 

     사실 이 부분을 첨가하기로 결정한 것은 바로 이스터섬 혹은 빠스꾸아 섬이라고 불리는 섬의 석상의 발굴 현장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저 두석상으로 알려졌던 이스터섬의 석상이 사실은 전신을 표현한 석상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손을 표현한 것이 소름 끼칠 정도로 띠와나꾸와 문명과 닮아있다. 문제는 이스터섬 모아이의 특성이다. 사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에 의하면 모아이는 AD400년경부터 1680년까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고 1200년경에 가장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띠와나꾸 이후이며 똘떼까에 앞서며 겹치기도 하고 이후까지 계속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1200년경에 가장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똘떼까보다 약간 이후에 전성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재까지 이스터 섬의 문명과 띠와나꾸 그리고 똘떼까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원통형의 바위를 조각해서 만든 것은 이 세 문명의 유산 사이의 공통점이다.

     띠와나꾸의 석상이 가장 원형에 가까우며 가장 단순하지만 웅장하고 우아한 것이 돋보인다. 똘떼까의 석상은 규모는 띠와나꾸의 석상보다 작으나 위엄이 넘치며 표현의 세련됨과 예술성이 돋보인다. 마치 마야의 석상에서 느낄 수 있는 섬세한 표현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스터 섬의 모아이이다. 모아이는 가장 단순한 형태로 보통 두석상으로 알려져 있고 약간 기괴한 느낌이긴 해도 주변에서 혹은 각종 미디어를 통해 닮은 사람을 찾을 수 있는 현실적인 모습이다. 또한 초기에는 팔과 다리를 다 표현한 것으로 보이나 후대로 가면 갈수록 크기도 작아지고 먼저 발이 사라지고 팔도 사라지게 된다. 마치 우리나라의 장승과 같은 모습이 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다리는 없어지고 팔은 남은 쉽게 과도기적 형태가 바로 우리나라 제주도의 돌하르방이다. 또한 남태평양의 다양한 도서지역에서 우리나라의 장승형태의 다양한 두석상을 볼 수 있다.


 

폴리네시아 오른편 마지막에 있는 것이 바로 이스터섬이다. 또한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많은 섬들이 있다.

실제로 2000 카누 형식의 배로 폴리네시아 섬들을 횡단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아메리카의 원주민 이주설에서 어쩌면 가장 신빙성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베링해협을 건너 온 것이 아니라 폴리네시안 도서지역을 통해 남아메리카로 유입되었다는 설이다. 지도에서처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섬들이 연결된 듯 놓여있고 뗏목의 형태건 배의 형태건 태평양을 건너 올 정도면 어느 수준 이상의 기술이 있었을 것이며 무엇보다 많은 남아메리카의 원주민 부족들이 티티카카 호수를 신성한 지역으로 여긴 것을 비롯하여 많은 부족들이 호수를 근간으로 발전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하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바에 의하면 시기적으로 뻬루 북부에서 발흥한 문명이 시기적으로 더 앞서며 현재까지 다양한 외부 유입설은 확실한 논리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특히 베링해협을 통한 이주설은 명백한 한계를 보이는데, 그것은 멕시코 중앙 고원을 경계로 마치 만리장성처럼 북쪽의 오랑캐 혹은 호전적이고 상대적으로 문화가 덜 발달한 지역과 문화가 발달한 지역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북쪽에서 유입되었다면 현재 알래스카, 캐나다, 미국을 지나오면서 특별히 주목을 끄는 문명이 발전하지 못한 것, 마치 만리장성 이북의 북방 유목민족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베링해협을 건넜다는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의 북쪽 끝에서 남쪽으로 어떻게 그리고 왜 이동했을까 하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가나안은 지척이다. 지도로 봐도 정말 놀라운 이동경로이다.

 

     개인적으로 동남아시아의 원주민 부족과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느낀다. 현재까지 특별히 설명할 길은 없으나 남태평양 도서지역을 통한 이주설이 개인적으로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보며 어쩌면 그 사이에 전설의 대륙 뮤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 제주도에서 라파 누이, 이스터 섬을 거쳐 띠와나꾸와 똘떼까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도서지역의 다양한 석상 혹은 목상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방식으로 제작되었는지 비교연구하는 것도 역사적 진실에 다가가는, 그럴 수 있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조각상처럼 구체적인 증거가 아닌 예술적 표현의 공통점이 있기도 하다. 마야의 석상들과 이스터섬의 모아이 사이의 공통점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우리나라의 돌하르방이 포함될 수 있다.) 모아이의 특징은 정면보다는 측면이며 측면 중에서도 바로 과장된 듯 보이는 이다. 또한 마야의 석상에서도(특히 빨렝께를 비롯한 정글 인접 문명에서 그렇다.) 코가 과장되어 있다. 실제로 마야의 후예 혹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 사이에서도 이런 코를 가진 이를 보는 것은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과 이스터섬의 원주민 혹은 폴리네시안 도서지역의 원주민들 사이에서도 이런 코 혹은 이런 얼굴형, 두상을 지닌 이들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실제 대상을 보고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외의 다른 이유에서 다른 의미로 이렇게 만든 것이다. 사람의 모습을 정면으로 표현할 것인가 측면으로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는 문화적 전통에 관련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측면을 강조한 문명은 이집트 문명이었다. 하지만 인물은 굉장히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하지만 모아이와 마야의 석상은 유난히 코가 왜곡되어 있다. 물론 이것이 미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해석하는 것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이다. 하지만 예술적 유적에 관한 고고학적 그리고 인류학적 연구만이 아닌 미학적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상당히 흥미로운 연구가 될 것이다.



종종 우주선을 표현한 것이라 언급되는 빨렝께의 빠깔Pakal왕의 석관 두껑이다. 턱이 발달해있고

코가 비정상적으로 표현된 것은 단지 빠갈왕의 특징만이 아니다.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석상에서, 부조로 그림으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