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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서 역사로 라틴아메리카 개정판 7.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시대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Latin Feel/역사 이야기

by Deko 2012. 10. 11.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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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빠냐 왕실의 관료 부왕 프란시스꼬 알바레스 데 똘레도 Francisco Alvarez de Toledo

                                         VS 원주민 지식인 뻴리뻬 과만 뿌마 데 아얄라Felipe Guaman Poma de Ayala

 

 

 

     “이 글은 신화에서 역사로 라틴아메리카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실수로 빠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문헌학적으로 잉까를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을 소개하고 그들의 텍스트 성격을 비교하고 그 차이를 이해한다면 잉까의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역사에서 문헌의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면으로 축복과 같은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유적만 존재하고 문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란시스꼬 알바레스 데 똘레도, 뻬루의 다섯 번째 부왕이다. 그는 신세계, 전혀 다른 세계에 에스빠냐 식민지를 건설하고, 관점에 따라 용어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미지의 곳을 정복하고 에스빠냐 인들을 이주시키고 관공서를 만들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시킨 인물이다. 신화에서 역사로 라틴아메리카 260 페이지에 그에 대한 약간의 언급이 주석 형태로 삽입되어 있다.

     뻴리뻬 과만 뿌마 데 아얄라, 원주민 지식인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인 시각으로 에스빠냐 왕에게 잉까와 그 이전 문명에 대한 역사를 소개하고 현재의 상황을 설명한 후 새로운 미래를 위한 제안을 하는 새로운 연대기와 좋은 정부El primer nueva coronica y buen gobierno라는 책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책을 제외하면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다




17세기에 제본된 과만 뿌마의 책, 현재 덴마크 국립도서관에서 보관중이다.


뻬드로 사르민엔또 감보아의 책, 특히 지도 등을 통해 당시의 세계관을 알 수 있다.




     이 두 사람에 의해 기록된 자료를 통해 우리는 잉까의 역사와 당시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프란시스꼬 알바레스 데 똘레도는 에스빠냐 왕실의 관료로서 뻬드로 사르미엔또 데 감보아Pedro Sarmiento de Gamboa와 함께 뻬루의 각 지역을 여행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구전되는 역사와 전설까지 수집하여 인도의 역사Historia Indica를 출판한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은 인도로 인식되었다. 물론 이것은 중세 유럽의 무지에서 기원한 것이다.) 세 파트로 구성된 이 보고서 형식의 책은 첫 번째 지리적 묘사와 설명 그리고 지도로 구성되어 있고, 두 번째 파트는 그들이 직접 채집하고 분석하여 재구성한 잉까의 역사 그리고 세 번째 파트에는 1572년까지의 정복사와 당시까지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기록은 상당히 정확하고 어떤 면으로 객관적이라 할 수 있으나 이 보고서 형식의 글은 확실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뻬루에서 부왕청 체제의 확립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보고서의 목적이었다. 또한 이것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여야 하며 동시에 에스빠냐 국왕에게 보내는 보고서이기도 했다. , 식민지 통치를 위한 정보 수집과 보고서 역할을 한 것으로 현재 경제/정치/문화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목적으로 인해 객관성이 의심받고 있으며 요즘 역사 연구의 추세가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되는 쪽으로 전개되다 보니 점점 사료로서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듯 보인다. 물론 이와는 반대로 인류학적 혹은 객관적 정보를 담고 있으므로 당시 시대상을 알기 위해 사료적 가치가 그 어떤 기록보다 높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프란시스꼬 알바레스 데 똘레도의 입장으로 보면, 그가 뻬루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자신들의 세력을, 대 토지와 군대와 노예를 거느린 에스빠냐 정복군(정규군이 아닌 사병私兵이었다.)이 지방 호족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신대륙에서 마치 자신만의 왕국을 만든 듯 행동했다. 마치 농노를 거느린 중세 봉건 영주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이들에 대항하여 크고 작은 봉기들을 일으키고 있었고 빌까밤바로 숨어들어간 잉까의 황제는 대규모 반란을 기획하고 있었다. 쉽게 프란시스꼬 알바레스 데 똘레도는 아군이 없었다. 그는 지방 호족처럼 성장해가고 있는 대농장주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원주민들의 소요와 봉기를 제압하고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으며 특히 잔존한 잉까의 세력을 확실히 제압해야 했다. 그는 대농장주들에게도 원주민들에게도 적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고려 초기의 태조 왕건과 그리 다르지 않은 상황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을 하게 한다. 태조 왕건의 세력은 부인의 수만큼이나 그리 크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프란시스꼬 알바레스 데 똘레도는 혼인 동맹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또한 대농장주들이 자신의 영지를 주장하는 근거가 자신이 스스로 정복했다는 것 외에 가톨릭 사제들과 함께 원주민들을 개종시킨다는 명분이 있었다. 쉽게 사제들과 동업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물론 당시 뻬루 지역에 있던 사제들이 공식적으로 서품을 받은 것인지 그저 사제인 척 한 것인지는 현재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각 수도회에서 보낸 사제의 수보다 현지에 활동하는 사제들의 수가 더 많았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교회는 에스빠냐의 왕 또한 어쩌지 못하는 절대적 권위를 갖고 있었다. 이 또한 고려 말기의 승려계급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과만 뿌마가 그린 프란시스코 데 똘레도, 정치적 관점으로 보면 서로 대립하는 인물이나 공통된 부분도 적지 않다.



      그는 칠레를 비롯한 뻬루 남쪽 지역과 아르헨띠나를 비롯한 빰빠스 지역을 탐험하고 정복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또한 무법천지였던 뻬루 지역에 법치를 실천할 수 있는 기틀을 닦았으며 역사적, 인류학적 기록들을 남겼다. 11 5개월(1569 11 30일부터 1581 5 1일까지)동안 잉까 제국의 잔존세력은 진압되었고 유럽의 도시와 비슷한 도시들이 건설되었고 제도적으로 당시 유럽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사회를 건설했다. 프란시스꼬 알바레스 데 똘레도가 가장 비판 받는 부분이 바로 잉까 제국의 마지막 황제 뚜빡 아마루Tupac Amaru의 효수梟首이다.


과만 뿌마가 그린 뚜빡 아마루의 효수 장면, 눈물 흘리는 민중들의 슬픔은 그저 황제의 죽음 때문만이 아니라 잉까의 마지막을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민중들의 바램이 뚜빡 아마루를 독립의 영웅으로 만들었지만 사실 잉까의 황족은 배신의 아이콘이었으며(신화에서 역사로 라틴아메리카 잉까 부분 참조) 선황의 독살 또한 뚜빡 아마루 혹은 그의 지지 세력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았다. 부왕의 입장에서는 잉까의 세력을 이용하여 원주민을 다스리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방안이었으며 원주민 세력을 통해 호족으로 성장한 대농장주를 압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뚜빡 아마루는 그리 믿음직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원주민을 통합할 수 있는 상징성을 지니면서도 대농장주와 언제라도 연합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사실 대농장주들이 황제를 시켜주고 다시 꾸스꼬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제안이 있었다면 뚜빡 아마루는 분명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원주민들에게는 에스빠냐 왕실에 그리고 부왕청에 반대하고 반란을 이끈 것의 결말을 보여주어야 했고 대농장주들에게는 잉까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부왕청을 힘을 보여주어야 했다. 물론 이것은 차선이며 최선은 아니다. 하지만 프란시스꼬 알바레스 데 똘레도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것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꿈꾸던 장면, 뻴리뻬 3세에게 자신의 제안을 설명하는 장면,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에 비해 뻴리뻬 과만 뿌마 데 아얄라는 1908년까지 알려지지 않던 이름이었다. 1615년 새로운 연대기와 좋은 정부El primer nueva coronica y buen gobierno를 썼고 에스빠냐의 왕 뻴리뻬 3세를 위해 쓴 이 제안서는 일단 마드리드까지는 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뻴리뻬 3세가 읽었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1660년경부터 덴마크 왕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PDF 형태로 원본을 열람할 수 있다. 또한 2007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물론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책의 국적은 덴마크이다.

      이 책은 1200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의 책이며 아주 야심 찬 제목, 새로운 연대기와 좋은 정부El primer nueva cronica y buen gobierno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사실 새로운 연대기와 좋은 정부는 직역을 한 것으로 그 의미가 모호하다. 의역을 하면 “최초의 남아메리카 역사와 새로운 정치제도” 정도가 될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 남아메리카의 역사와 새로운 정치제도에 대한 제안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책은 뻴리뻬 과만 뿌마 데 아얄라Felipe Guaman Poma de Ayala가 썼으며 그는 당시 노인이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의 관점과 처지가 아주 흥미롭다. 그는 잉까 이전에 존재했던 야빌까Yavilca 왕실의 후예라고 스스로 밝힌다. 과연 몰락한 왕실의 후예의 처지가 어떠했을지 상상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가야의 왕족 같은 대접은 받지 못한 것 같다. 쉽게 잉까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원주민의 시각으로 초기 식민사회를 바라본 기록이라는 부왕청과 대농장주들에 의해 권력에서 소외된 잉까, 그리고 잉까에 의해 권력에서 소외된 저자의 입장은 오히려 소외의 소외라는 이중 소외가 아니라 더 균형적이며 오히려 중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 이 텍스트의 가치가 있다. 나라를 잃어 피 끓는 심정, 뜨거운 가슴으로 독립을 외치는 잉까인이 아니라 거기서 한발 물러선 혹은 “ 너희가 겪고 있는 그런 심정을 우리는 이미 너희에 의해 겪었지.”라는 관점을 가진 원주민의 관점은 상당히 냉정하며 객관적일 수 있다. 아마 조선 후기의 서얼과 중인들의 심정과 관점 혹은 신라 말의 6두품 세력이 갖고 있던 관점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내용인 사도 바르똘레메의 라틴아메리카 방문을 그린 삽화. 이 논리에 의하면 라틴아메리카는 더 이상 선교의 혹은 교화의 대상이 아니게 된다.



과만 뿌마가 상상하는 라틴아메리카 버전의 아담과 이브, 위의 망토를 두르고 머리에 삼각형의 문양이 있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다. 삼각형은 아마도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16세기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 지식인이 상상던 하나님의 모습이다. 아래의 그림은 원주민 전통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아담과 이브의 모습이다.



     또한 이 책도 어떤 목적이 있다. 일단 무엇보다 왕이 읽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 왕이 이 책을 읽고 어떤 결단을 내리기를 바라고 있다. 그 결단은 원주민 자치이다. 그는 마치 구한말의 혜강 최한기를 연상케 하는 지식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 정치적 흐름을 아주 잘 읽고 있었다. 유럽은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로 가는 과정, 다시 말해 절대왕정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봉건영주가 아닌 왕이 직접 통치를 하거나 왕이 임명한 관리를 파견하는 것이 시대적 흐름이었다. 과만 뿌마는 이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원주민 자치를 제안하며 오로지 에스빠냐 국왕에게 충성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또한 가톨릭과 유럽의 사상을 개념적으로는 훌륭하게 이해했다. 하지만 부왕들은 에스빠냐 국왕에게 임명을 받는 관료였으며 지방 호족으로 혹은 봉건 영주로 성장한 대농장주들은 이미 에스빠냐 중앙 정부에 줄이 닿아있었고 뇌물로 연계되어 있었다. 또한 원주민 자치를 인정하기 전에 그들의 충성도를 확인해야 하는데 에스빠냐 국왕의 입장에서 그러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가 결정적으로 실수한 것은 에스빠냐 국왕이 공명정대한 가톨릭적(원래 가톨릭은 보편적이란 의미이다.) 인물이며 전 세계를 호령하는 황제처럼 인식했다는 것이다. 에스빠냐의 국왕도 신앙 앞에서, 아니 교회 앞에서는 그저 하나의 신자信者일 뿐이었다. 그가 고발한 사제단의 횡포와 비리는 왕이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과만 뿌마의 특이한 점은 아주 얼굴이 두껍다는 것이다. 원주민 자치를 말하면서 원주민의 왕으로 자기 아들을 추천한다는 것, 혹은 스스로 왕의 아버지, 대원군이 되고 싶었던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주 뻔뻔하게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추천한다는 것이며 그 이유가 외가 쪽으로 잉까 황제의 후손이며 자신의 핏줄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야빌까 왕조의 후예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저 그의 텍스트에서 그의 목소리로 하는 주장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은 기본적으로 학대받는 대상으로 표현된다. 그 들은 에스빠냐 왕실에서 파견된 관리들에게, 대농장주들에게 그리고 교회의 교리담당 신부들에게 무분별하게 학대받았다고 한다. 위의 2개의 삽화는 학대받는 원주민을 표현하고 있고 아래의 삽화는 금을 비롯한 보화의 소재를 알기 위해 정복자들이 잉까의 왕족을 고문하는 장면이다. 과만 뿌마는 자신의 외할머니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그의 사상은 원주민 독립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그저 배신자의 목소리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사상은 아주 현실적이다. 정치적으로 에스빠냐 왕실의 권위를 인정하고 이 질서 안에 편입됨으로 인해 자치권을 인정받고 정치적 안정을 누린다는 것과 인식론적으로 가톨릭의 보편 사상을 받아들여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주장의 목적은 원주민 공동체를 회복하고 원주민 자치를 통한 안정과 번영을 누리려 하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세계질서에 원주민 사회가 온전하게 하나의 일원으로 참여하길 바라는 부분도 있다. 그리하여 정치/경제적으로는 에스빠냐와 통합되지만 문화적으로는 다양한 민족성이 인정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최종적 목표였다. 물론 자치라는 말에는 정치 경제적 독립 또한 어느 정도 포함된다.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할 지 약간 애매한 부분이 있다. 제국주의에 대한 거부감, 특히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과만 뿌마의 제안은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하는 이때에 마치 친일파의 궤변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과의 조공관계와 세자 책봉 등을 중국에게 허가 받았던 고려 삼별초의 난 이후 대한 제국 성립 이전까지의 우리 역사를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가장 합리적으로 현실적인 정치적 대안이었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1200페이지에 달하는 책에 398개의 세밀한 삽화가 포함되어 있다. 잉까 이전의 역사와 잉까의 역사 그리고 정복사를 말하고 새로운 통치 형태를 제안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결국 새로운 통치 형태에 대한 근거로 역사가 저술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원주민 자치를 위한 도구 혹은 근거가 된다. 원주민 자치를 위한 실질적인 걸림돌은 바로 대농장주이다. 그들의 권리가 바로 ‘정복’이라는 행위에서 나온다고 보았던 그는 정복이라는 개념을 해체해버린다. 정복은 없었으며 잉까는 스스로 부패하여 자멸한 것이라 역설한다. 물론 자멸한 황실의 핏줄을 이어받은 것이 자치 사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되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정복이라는 개념이 해체되면 대농장주들이 그들의 권리를 주장한 근거가 없어지게 된다. 또한 에스빠냐 부왕의 월권과 무능을 고발해야 원주민 출신 부왕의 필요성을 역설할 수 있다. 특히 프란시스꼬 알바레스 데 똘레도가 뚜빡 아마루를 효수한 것이 대표적 월권이라 주장하는데 이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으며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사제단의 횡포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원주민들이 이미 가톨릭 신자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AD 40년 예수의 사도였던 바르똘로메(12제자였다는 것 외에는 그리 특별한 기록이 없다.)가 남아메리카 지역을 여행하며 많은 악마를 물리치고 기적을 행했으며 세례를 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논란의 여지가 많은 언술이다. 다만 이렇게 될 경우 에스빠냐 지역보다 확실히 먼저 초기 기독교가 남아메리카 지역에 건너 온 것이 되며 이것을 기준으로 당시 에스빠냐 왕실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던 원주민들이 사람이냐 동물이냐는 논쟁의 종지부를 찍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람이냐 아니냐라는 논쟁은 그들도 이미 세례를 받았고 믿음을 가진 이들이라는 것으로 더 이상 언급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농장주와 부왕과 부왕청 그리고 사제들을 비판함으로 인해 원주민들도 에스빠냐 인과 다르지 않으며 당연히 자치권 혹은 시민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비슷한 주장을 하던 것이 바로 도미니크 수도사들이었다.


 

1. 황제가 매장되는 장면 2. 8번째 황제 우이라 꼬차 잉까, 의복 문양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3. 심부름꾼 혹은 전령, 손에 든 끼뿌에 편지라고 기술되어 있다. 잉까에 문자가 없었다는 것은 오해로 봐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가 있어야 한다. 에스빠냐의 왕은 신에게 축복을 받은 이, 정의로운 통치자, 왕의 백성들은 왕 아래에 모두가 평등하며 왕만 오로지 모든 권위를 갖고 있어야 하며 신의 마음을 지닌 이어야 한다. 오로지 왕에게만 충성하는 것이 당연한, 왕을 제외한 모든 권위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에스빠냐의 왕과 교황이 일치될 때 가능한 것이었다. 제정일치 혹은 선민사상이 강했던 잉까 황제의 개념이 강했던 탓인지 과만 뿌마는 별 무리 없이 이런 개념을 받아들였다. 또한 대농장을 해체하고 전통적인 원주민 공동농장, 아이유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균전제 [均田制]를 연상케 하는 이 아이유는 원주민 공동농장으로 수확의 일부를 왕실에 세금으로 내는 것으로 대농장주, 교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왕실에 세금이 납부될 경우 왕실은 상당한 세원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사상적인 부분과 동시에 현실적인 부분에서도 대안이 있었으며 이것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민족주의적 정서 혹은 감정적 부분에 호소하지 않으며 가능한 현실적인 대안과 그것을 지지하는 사상적 부분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이 대농자주들의 월권과 횡포는 에스빠냐 왕실을 골칫거리였다. 이미 1542년 신법Nueva Ley에 의해 농장제가 폐지된 적이 있으나 대농장주들의 대대적인 반란에 의해 무마된 적이 있다. 이미 이때에 그들은 에스빠냐 왕실이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아메리카 대륙의 거대한 식민지 자체가 에스빠냐 왕실에게는 무리한 대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프란시스꼬 알바레스 데 똘레도와 뻴리뻬 과만 뿌마 데 아얄라는 스페인 국왕에게 충성한다는 점과 대농장주들에게 반대한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하지만 프란시스꼬 알바레스 데 똘레도는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잉까를 비롯하여 원주민들이 무언가 결핍되어 있는, 잉까는 독재적이고 미신적인 사회였고 원주민들은 합리적인 면과 신앙이 결핍되어 있는 존재로 묘사하였다. 뻴리뻬 과만 뿌마 데 아얄라는 원주민 자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부왕과 대농장주들과 사제들의 월권을 비판했다. 그의 관점에 의하면 이들은 탐욕에 이성을 잃어버린 존재였다. 시기적으로 뻴리뻬 과만 뿌마 데 아얄라는 프란시스꼬 알바레스 데 똘레도를 비판하는 입장이 된다. 하지만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당시 현실적 과제, 반란 민중 봉기, 대농장주의 반란, 새로운 식민지의 개척, 광산의 계발 등이 서로 얽히고 겹치는 다이내믹한 변화가 용솟음치는 난세亂世였다. 어쩌면 그 난세에 이 둘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쉽게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었을까?

 

 

      덧붙임: 책에서 뻴리뻬 과만 뿌마 데 아얄라는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80세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p.1104) 이것을 그의 나이로 오해하여 기록들의 연대가 맞지 않는다고 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1550년에 태어나 1600-1615년에 자료를 조사하고 원고를 쓴 것으로 본다. 최대로 보아도 65세를 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나 원주민들의 경우 노화의 정도를 기준으로 봤을 때, 65세와 80세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는 없다.

 

     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는데 뻴리뻬 과만 뿌마 데 아얄라에서 과만 뿌마는 께추아어로 독수리 표범이라는 의미이며 와만 뿌마(Waman Puma)라고 발음된다. , 과만 뿌마Guaman Puma와 와만 뿌마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원주민 지식인이 바로 과만 뿌마이고 와만 뿌마는 께추아로서 원주민의 정체성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페인어의 사투리 특히 세비야와 기타 카리브해 지역의 사투리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한다. 스페인 남부의 경우 G발음이 혹은 ''발음이 앞니에 혀가 붙었다 떨어지며 되는 것이 아니라 목구멍에서 울리면서 발음된다. (발음기호로는 gw로 표현된다.) 쉬운 예로 아프로 쿠반 룸바를 의미하는 Guaguanco의 경우 과관꼬>과광꼬>와완꼬>와왕꼬 등으로 발음된다. , 표기상으로는 다르지만 발음상으로는 같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흡사하게 표기한다고 해도 외국어의 경우 쉽게 본토 발음과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철자 상의 차이로 기표의 차이로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어쩌면 편협한 무지의 소치일 수 있다. 물론 이것을 왜 언급하는지 의아해하실 분들이 있겠지만 이 의아함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이 실제로 학계의 주요한 쟁점으로 수년 동안 논의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께추아어과 스페인어로 대표되는 이중적 정체성은 썰을 풀기에 아주 좋은 소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말장난, el juego de la palabra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라틴아메리카, 아메리카 라티나, 히스파노 아메리카 등이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관점과도 그리 다르지 않다. 썰을 풀기는 좋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저 말장난일 뿐이다. ‘대한민국, 한국, 코리아’가 서로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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