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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보수는 상대적인 개념이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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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글을 쓸 계획이 별로 없었고 

다른 곳에 이미 비슷한 내용의 글을 쓰기도 했고 그렇게 큰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데 

러시아계 한국인 어떤 면으로 골수 공산주의자 혹은 진짜 빨갱이라 불러도 무방한 

박노자와 지승호의 "좌파하라"라는 책의 광고 문구를 보면서 뭐랄까 글을 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좋은 글이고 좋은 책일 것이다. 박노자의 글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던 부분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냉철함이 있었다. 하지만 사상적 동질감이 없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 것이다. 

좌파란 말도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다. 좌파란 용어가 진보로 바뀌면서 그 내연과 외연이 넓어졌다. 


쉽게 좌파는 반 자본주의 노선을 기본으로 그 안에 사회주의가 있고 

진보라고 하면 보수의 상대어로 사회를 개혁적으로 바꾸려는 모든 운동이 여기에 포함되는  보인다.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은 여러 가지이다. 실제로는 보수를 정의하기 보다는 진보를 정의하는 경우가 많지만. 

진보에 대한 정의는 삶을 전체적으로 개선시키려 하는 모든 노력이라는 광범위한 정의에서 사회주의적 운동으로 

한정시키는 좁은 시선도 있다. 


좁은 시선일 수록 '좌파'라는 의미에 가깝고 넓은 의미일 수록 진보에 가까운 경향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용어의 정의, 개념은 그저 언어유희이기 쉽고 또한  실제 현실과 그리 큰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톰 크루즈의 딸 수리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고 해서 그 아이의 본질이 달라질 리가 없고

진보라고 불린다고 갑자기 보통 사람이 투사가 되지도 않고 보수로 불린다고 꼴통이 되지 않는다.


이런 정의 놀이는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하는가'보다 '그게 무엇인가'가 더 중요했던 유럽의 전통이다. 

또한, '진짜'를 외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진짜'라는 말은 '가짜'라는 말을 전제로 한다. 

진짜를 외치는 사람은 나만 옳다는 독단과 그리 다르지 않은 스탠스를 갖고 있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진보와 보수는 상대적인 개념이 되어야 한다. 

또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생명을 갖고 움직이는 개념이 되어야 한다. 

쉽게 '보수적'이고 '진보적'이라는 표현, 경향성에 대한 표현은 가능해도 

진보다, 보수다라는 표현은 위험하다. 현실에 100% 진보적인 사람이 있다면 그는 ... 

확실히 초월적 존재일 것이다. 어떤 면으로 절대적 영역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경향성으로  -8에서 -2로 간다면 양(陽)의 경향성을 보이는 것이고 +7에서 +2로 간다면 

음(陰)의 경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 어디인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이다. 

우리가 서 있는 위치에서 변화의 방향과 경향성으로 보수와 진보가 정해진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서있는가? 

물론 여기서도 다양한 이론이 나올 수 있다. 척박하게 구분하면 우리는 왕정시대에서 식민지시대, 과도기적 독재(자유당), 

군부독재 및 개발독재(유신과 5공과 6공), 과도기적 반독재시기에서 바로 신자유주의로 넘어왔다.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 시민권이 성립하고 민주주의가 자리잡고 자유주의가 형성하고 발전한 과정이 

우리 역사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정시대의 전통과 과도기적 독재 그리고 개발독재와 군부독재 시대의 모습이 

그리 이질적이지 않게 겹치며 여기에 냉전적인 대결구도와 반공이데올러기가 합쳐지면 

정말 묘한, 서구에서는 보수적으로 분류되는 자유주의가 싸워왔던 중세적 가치가 보수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특히 경제적인 분야에서 자유주의의 효율성, 특히 자본 축척의 효율성을 강조한 신자유주의가 등장했고 

그 이전에 이미 자유주의를 비판한 사회주의적 흐름이 존재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8로 가기 위해 현실을 보지 않고 8만 보라고 하는 것, 1-2-3-4-5-6-7을 거치지 않고 

8로 갈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퍼퓰리즘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이 학문적 논의가 아니라 현실적 고민, 적어도 5년 단임제의 대통령과 정부에게 바라는 것이라면 

더 중요하고 실질적이다. 


게 재 된 이 만 게 면 다.

다.  

적어도 이것이 5년 단임제 대통령과 정부에 기대해야 하는 것일 것이다.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고전적 혹은 올드 자유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말 자체가 자본론이 성경이고 맑스가 예수인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이 정통보수라고 자부하는 독재의 그림자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맑스도 자신의 이론과 자신의 책을 21세기에도 성경처럼 보고 신봉할지는 

몰랐을 것이다. 계몽주의에서 낭만주의, 초현실주의로 시작하는 아방가르드 시대는 후대에게 부정당하고 비판당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던 새로움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자들과 초현실주의자들에게 현재의 원론적 사회주의자들은 

교조주의자로 보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 자유주의 혹은 고전적, 올드 자유주의가 무엇인지 언급하지는 않겠다. 절대왕정 이후 혹은 봉건 질서 이후의

모든 것이 자유주의의 영향 아래에 있었고 정치적 자유주의의, 문화적 자유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그리고 사회적 자유주의까지 

다양한 근대 사회의 기본 원칙들이 자유주의에서 잉태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우리에게 결여되고 결핍된 것이다. 


또한 자유주의에 대한, 혹은 고전적, 올드 자유주의에 대한 강조로 인해 큰 고리를 만들 수 있다. 

이 고리에 친노계, 통합진보당 참여계 그리고 안철수 교수를 지지하는 세력이 뭉칠 수 있다. 

야합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사상을 기본으로 연합할 수 있다. 원칙 아래에서 말이다. 

(물론 구민주계도 예외는 아니며 새누리당의 일부 합리적 보수주의자들도 포함될 수 있다.어쩌면 새로운 정계개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안철수 교수의 열풍이 그저 단순한 붐이라고, 후보 검증에 들어가면 사그라들 것이라고 하지만 

안철수 교수의 원칙이 지켜지는 올드 자유주의적 메시지가 충분히 공감을 얻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현 정부의 비리 사건이 터지면 터질 수록 이 메시지의 힘은 커지면 커지지 작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들, 혹은 부동층이 원하는 경제 민주화도 재벌들이 반칙을 하지 않고 원칙을 지키며 

독과점 등에 시장 질서를 어지럽힌 것에 대하여 이에 걸맞는 사회적 책임을 지는 수준일 것이다. 

원칙을 지키고 공명정대하라는 것이다. 믈론 이것이 시작이다. 

하지만 5년 단임제의 정부에서는 이것을 완료하기만 해도 적지 않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상황, 그 문제에 대한 공감이 있으면 그 해결법은 보통 쉽게 나온다. 

일반적으로 문제를 함께 인식하고 공감하는 것이 어렵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다. 

아마 개인의 상상이기에 단언할 수 없지만 안철수 교수와 이야기 하려면 이런 구조, 

1. 현재 나는 이런 이런 것이 문제라고 본다. 2.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3. 그래면 해결책은 .... 이런 순서로 나가면 어떤 합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것이 제일 좋으나 그것이 어렵다면 친필 편지도 꽤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물론 경제적인 면만 본다면 최우선 과제는 경제 민주화가 아니라 

1. 중소기업 지원문제 2.자영업자 지원문제 3. 비정규직 문제 ... 가 최우선 과제일테지만. 

경제민주화가 마치 사회혁명처럼,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과 같이 시민혁명을 통해 한번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각 경제 주체들이 합의해야 하는 변화의 방향, 그 기준이 될 것이다. 5년 임기 정부가 완료할 문제는 아니다. 




연대의 기본 축이 어떤 정파나 세력을 반대하는 것이라면 그 부정적 영향력으로 인해 부동층에 대한 흡수는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사상과 이념을 통한 광범위한 연대, 올드 자유주의 연대는 그 자체로 

파급력이 상당히 클 것이다. 또한 여론 조사 등을 통한 대결이 아니라 역할을 분담하는 연정 형태의 

선거 연대가 서울시장 선거 때보다 적극적이며 강하게 일어나면 그 시너지는 작지 않을 것이다. 

물론 보수적 연대라고 할 수도 있다. 잘 몰라서 저런 소리 한다고 할 수도 있다. 

마이너스에 있으면 원점으로 제로 포인트에 온 다음에 양의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여전히 혁명을 꿈꾼다면 어쩌면 미성숙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나 둘 ... 열.... 이렇게 말이다. (물론 천재라는 사람들은 하나 둘 ...백!!! 인 경우도 있지만 사회는 그렇지 않다.)



추신: 시장은 공명정대 할 수 있어도 도덕적 개념이 포함된 정의로움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개념이지 경제적 개념이 

아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는 없다 등등의 언급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개념적으로만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도덕적이다 도덕적이지 않다는 다분히 감성적인 판단이다. 자본이 감정적으로 감성적으로 흐르지는 않지만 감정과 감성은 

마케팅에서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이다. 자본주의 자체는 개념적으로 비인간적이 수 있다. 최대의 효율성에 인간적인 것, 

감정/감성적인 것은 장애물일 뿐이다. 하지만 시장이나 자본주의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또한 하나의 주체가 아니다.

주어는 언제나 사람이다서 는 만 로 다. 운 과 의 을 한 

가 . 인간은 그렇게 절대적으로 도덕적이지도 그 반대도 아니다. 한때는 이성이 인간다움을 상징했는데 

이제는 감정이나 감성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개념도 임위적인 것이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인간이 만든 사상을 

인간이 수정할 수 없다는 것은 바보같은 생각이다. 

경제 민주주의는 사실 맑스도 놀랄 만한 사고의 전환이다. 민주주의, 정치적 개념, 정치 권력은 세습되지 않는다. 특정 가문이 

정치권력을 독점할 수 없다. 정치 권력을 모든 시민이 나누어 갖는 것, 바로 이것이 민주주의이다. 그런데 사유재산 때문인지 

경제권력이 특정 가문이나 계층에게 독점되고 세습되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비판적이지 않다. 결국 경제권력을 다수에게 혹은 

국민들에게 돌려주자는 것이 바로 경제 민주주의 핵심이다. (개인적으로 한 판단이다.) 어쩌면 이 경제 민주화를 훌륭히 

이루어내는 것이 많은 국가의 역사적 과제가 될 것이다. 


추신 2: 모든 시민, 국민을 주권자로 바라보며 집회결사,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며  문화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으며 양심에 따라 살 수 있는 삶,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넓게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누릴 있는 모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삶, 경제적으로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여 대기업의 전횡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정부, 사회적으로

공리주의적 토대에서 모든 시민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 이것이 올드 자유주의에 포함될 수 있는 내용

들이다. 


추신3: 중세적 수구세력도 전 세계에 보편적인 경향이다. 미국의 모 당의 후보는 완전 복음주의 꼴통이었고 세상의 종말 등을 

공식석상에서 언급할 정도였다. 경제위기를 기도로 극복하자고 할 것 같은... 또한 문화적으로 중세를 살고 있는 이슬람 문화권도 

있다. 각각의 사회, 국가는 저마다의 현실이 있고 그것을 기준으로 진보와 보수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히잡을 여성들에게 강요하지 말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체로 굉장히 진보적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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