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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유사과학, 사이비 과학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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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자기 자신은 특별하다고 느낀다. 중요한 것은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저 느낌이다. 객관화하고 절대화하기 어렵다.

쉽게 모든 사람이 그렇게 느낀다면 모든 사람이 특별하다.

그래서 그 누구도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자기 자신은 절대적이다. 치환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그 관계들도

절대적이다. 바꿀 수 없고 교환할 수 없다.

 

관계의 절대성을 아무리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각 개인간의 문제이고

사회라는 기준으로 보면 다 같은 부모관계, 친구관계이다.

쉽게 위계질서가 생길 리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부모가 중요하고 내 자식이 중요하면 남의 자식도 남의 부모도 중요한 줄

알아야 한다.

존 롤스는 이런 간단한 도덕에 해당하는 것을 과학으로 보이고 싶어 했다.

마이클 샌들 교수의 해석이지만 비연고적 자아는 그냥 개념이다. 추상적인.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모두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비주의는 항상 이런 틈을 노린다. 추상과 구체, 절대와 상대 사이

혹은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신비주의는 자라게 된다.

 

어떤 사람은 살아있고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고 그런 관계 자체가 축복이고 신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일상이 감사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다.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그게 달 인줄 아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박진영은 힐링캠프에서 자율신경계와 의식 혹은 의지를 비교하며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러므로 자신의 생명 또한

자신이 관리하지 못하는 것이라 …. 뭐 이것과 꼭 같지는 않지만 말을 했다.

 

내 생명 자체가 신비로운 것이다.

 

그 다음 일상이 신비가 되면 겸손의 단계로 들어가야 하나

수준에 따라 그 반응은 다양하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류, 데이비드 호킨스의 운동역학이라는 것은

유사과학, 쉽게 사이비 과학이다.

우리는 유사품에 우리는 항상 유의해야 한다.

 

인간의 언어 그것도 문자에 물이 반응하여 냉동되며 다른 결정을 맺게 된다는 것은

유아론적 오류이며 유치한 생각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의 결정은 그렇다면 대자연의 의지 혹은 신의 의지일까?

물의 결정이 아무리 노력해봐야 눈의 결정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에 견줄 수 없다.

또한 인과관계에 대한 설정도 문제지만 적어도 인간의 의지 따위가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영향을 대자연에 미친다는 생각은 진화론적 오류로

만일 그렇다면 이미 예전에 우리의 지구는 망하지 않았겠는가?

 

본좌 허경영님은 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들어 맞잡은 상태에서 어디가 안 좋으니

맞잡은 것이 풀리지만 자신이 어디를 치료했다거나 자신의 눈을 바라보고 어쩌구 하면

다시 강해서 맞잡은 것이 풀리지 않는다는 쇼를 여러 번 했다.

데이비드 호킨스의 운동역학이란 것은 사실 더 코미디이다.

X라는 책의 진정성은 200이상이다이게 맞는다면 근육에 힘이 생겨 버티고

아니라면 약해져 버티지 못한다고 한다. 양팔을 벌려 선채로 다른 사람이 누르기도 하고

방법은 다양하지만 뭐 본좌님과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따위 것을 과학이라거나 혹은 진리라고 하면 그때부터 인생이 피곤해진다.

일단 수치로 기록된 것, 세계의 고전이나 경전들이 수치로 표현되며 그 자체로 위계질서가

생긴다. 과연 경전의 가치를 수치로 표현할 수 있을까? 다분히 신화적이며 시적이며

메타포가 넘치는 상징적인 경전들이 말이다.

또한 수치로 표현하면 그걸 각 개인이 절대적이라고 봐야 할까?

반야심경, 유마경, 금강경과 성경을 비교할 수 있을까?

물론 비교할 수 있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누군가 성경은 100이고 금강경은 80이다라고 하면 그걸 불교도가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서구 문명은 어쩌구 동양문명은 어쩌구 하면 그걸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여야 할까?

근거가 바로 저 단순하고 유치한 운동역학이라는 것이라면 말이다.

 

인간이 합리적인 것을 포기하고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은

간단하다, 약하기 때문이고 특별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쉽게 혹~!! 하게 만든다.

 

인생이 이렇게 단순하게 맞아 떨어지는 사람들은 얼마나 편하겠는가?

 

또한 감정 사이의 위계질서는 있는 듯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각 감정들은 서로 다를 뿐 위계질서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이 한 가지 감정만을 주로 느끼게 되면 ….. 미친 거다.

항상 기쁘고 웃고, 기쁨의 한가운데 있는 광인들도 적지 않다.

각 감정들을 상황에 맞게 잘 느끼고 그 반응 또한 상황에 맞게 할 때

균형 잡힌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 이상의 존재도 인간 이하의 존재도 아닌 좋은 인간이 되는 것

그 이상이 어떻게 인간 가운데 존재할 수 있을까?

 

물론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속는다. 어떤 트릭들에.

감정을 수치로 표현하고 위계질서를 만든 후 이것은 서로 다른 것일 뿐

어떤 감정이 우월하다고 할 수 없다고 하면

그건 그냥 나중에 문제가 될 까봐 만들어놓은 안전벨트이다.

 

설탕은 당도가 80이고 꿀은 90이야, 근데 둘은 그냥 다른 거야.

이런 말을 그냥 받아들이면 뇌와 이성이 굳어버린 것이다.

둘은 다르기도 하지만 당도라는 기준에서 차이가 있고 그 차이는 서열이 된다.  

 

신약과 삼국유사의 공통점이 있다.

(삼국유사는 알고 보면 역사서가 아니라 이 땅의 불교 전도서이다. )

 

치유의 기적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치유의 기적들은 신앙을 갖게 하는 아주 강력한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잘못하면 사이비들과 구분되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면으로 천신, 만신의 개념으로 봐야 한다.

아무리 성전에 제사를 들이고 희생제물을 바쳐도 낳지 않던 자식이

예수의 손길에 치유되었다면?

아무리 토속 신관들이 제사를 들이고 기도를 해도 낳지 않던 공주가

인도의 고승의 염불에 완치되었다면?

 

상황은 바로 정리되는 것이다.

 

물론 사이비 과학이라고 해도 수단으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의심이 많고 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이고 진실한 삶을 살게 하는 수단이 된다면 의미가 있다.

 

하지만 긍정과 부정이 확실히 구분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굳이 변증법을 말하지 않아도 굉장히 유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쉽게 변증법의 반은 합을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변화를 위한 것이다.

현실에 대한 비판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해가기 위함이다.

그런데 현실을 무한 긍정해버리면 스스로 비판의 시각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행복이란 어쩌면 자세에 있는 지도 모른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현재의 노력, 그 노력하는 자세,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움직임 그 자체가 행복이라 볼 수 있다.

이 움직임의 전제에는 바로 비판정신이라는 것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 했지만

이 역동적인 현실에서 행복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비교급의 형태로 그리고 부사의 형태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형용사도 가능하다)

더 하고 잘 하고, 동사 즉 행위를 수식하는 방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이비 과학이라도 꼭 봐야 믿는 사람, 보지 않고 믿어

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 것만을 본인이 옳다고 믿는 것만을 믿는 사람은

그저 광신도인 것이다.

 

주체와 객체의 문제는 미학의 테마이기도 했고

경험론과 합리론, 흄과 버클리의 이론을 놓고

데이비드 호킨스 류의 책을 보면 느끼는 것은 비슷할 것이다.

이게 원본이고 이게 짝퉁이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영적이다. 영성이라는 것은 육체적이다. 육체성의 반대말이다.

물론 우리의 개념은 아니다. 플라톤 이후로 전해지는 이원론이고

영성을 신비화하면 할수록 그 이론은 플라톤에 가까워진다.

더 나가면 신플라톤주의적인데 ….

신플라톤주의는 가끔 그노시즘으로 오해 받기도 하고

기독교에서는 이단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아무리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해도

정말 묵을 데로 묵은 것을 새롭다고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감정의 위계질서는 아무리 부정해도 그 자체로 상승의 원인이 된다.

예전에 유행하던 용어를 사용하면 구조적으로 말이다.

감정은 항상 감성의 주체를 상정하게 된다.

슬픔이건 기쁨이건 내가 느끼는 것이다.

물론 불교적으로 보면 좀 다르고

우리의 언어 관습으로 보면 좀 다르지만 말이다.

내가 이런 류의 감정을 주로 느껴야 한다. 밑이 아닌 위를 향해야 한다는 것과

이런 감정 저런 감정 다 잘 느끼며 반응을 스스로 조절하여

무조건 반사, 조건반사적인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말이다.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라는 말이 아니라)

순간 느껴지는 감정을 충실히 느끼고

그 반응 또한 가능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하려 노력하는 것 외에  

모든 신비주의는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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