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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칸딜의 기적El Milagro de Candeal, 기적은 이제 시작이다.

Latin Feel/음악 이야기

by Deko 2011. 9. 26.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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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니메이션 치코와 리타를 쓰고 나서 잊고 있었던 글이 다시 떠올랐다.
벌써 한 5년이 지난 후였기에 이것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고민한 하느니
일단 쓰고 보자는 생각으로 예전에 썼던 파일을 찾아 재편집을 한다.

 

     글을 버려 두었던 이유는 베네수엘라의, 어떤 이들을 음악혁명이라고 이야기했던 엘 시스테마El sistema를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칸틸의 기적은 빈민가의 아이들이 음악을 통해 사회적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아로새긴 상처를 치유하고
손에 무기를 놓고 폭력 대신음악으로 서로 공감하고 동감하기 시작했다는 점이고 이것은 엘시스테마와 그리 다르지 않다.
칸딜의 기적과 엘시스테마 모두 EIDF에 소개된 적이 있다.

 

      물론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감동은 엘시스테마가 더 강한 편이고 선택의 여지가 없이 여전히 생존과 경쟁을 위해
오늘도 밤을 지새는 우리 땅의 아이들을 떠오르게도 한다.

 

      하지만 희망이란 단어를 붙이기엔 무언가 모자라다. 손에 무기를 놓는 것만으로 혹은 폭력을 멀리하는 것만으로
이 라틴 아메리카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 비슷한 생각 때문이다.

충분히 희망적 메시지를 담고 있고 아이들이 긍정적인 꿈을 꾸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포인트이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어줄 사회적 인프라가 없다면 그것은 그저 백일몽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긍정의 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인간이 꿈을 꾼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까마득하다.

 

       라틴 아메리카의 폭력, 빈민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마피아들과 폭력은 생존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산업이 발전하며
시장과 유흥가를 중심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존을 위해 어쩌면 그들을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방법이라
볼 수도 있다. 배가 조금 고픈 것은 인내하고 참아낼 수 있으나 아예 굶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에서 미래에 대한 꿈을 꾼다는 것은 어쩌면 생존을 포기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음악과 카니발, 엔터테이먼트로는 변화를 이끌 수 없다.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는 할 수 있을 지 몰라도 말이다.
물론 이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화이트헤드의 생각이다.

 

 

Salsa de Brasil

제목이 살사이나 들으면 바로 알 것이다. 아! 차차 ...라고

물론 차차치고는 좀 빠르긴해도 느린 살사보다야...

 

      음악적으로, 특히 라틴 음악이라는 커다란 범주로 본다면 이 다큐는 굉장히 애매하며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을 접근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나 멕시코 만부터 카리브 해 도서지역으로 이어지는 큰 원을 트로피컬 지역이라 부르며 이 지역의 문화,
특히 음악과 춤에서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본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바로 브라질이다.

 

     브라질과 쿠바.

     흑인 혹은 흑인에 가까운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백인에 가까운 사람도  적지 않다.

     또한 축구야구로 상징되는 차이는 어쩌면 음악에서도 재현되는지 모르겠다.

 

      쿠바 음악과 브라질 음악은 재즈와 연관성을 가지면서고 약간 다르다.  쿠바 음악은 재즈의 초기 성립에서 비밥
그리고 현대적 라틴 재즈까지 영향을 미쳤고 어떤 면으로 북중미에서 발전한 재즈의 고향 혹은 영감의 원류 같은 이미지가 있고
삼바는 쿨재즈와 결합하여 보사노바를 형성하여 60년대에 큰 인기를 얻게 된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맘보와 삼바가 결합한 것으로
보지만 보통 쿨재즈와 결합되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여기에는 쿨재즈의 쿨함에 대한 몰이해 혹은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영화는 쿠바음악과 브라질 음악의 새로운 퓨전을 다분히 기대한 것으로 보이지만 음악적으로 그리 큰 성과는 없다.
쿠바 음악과 브라질 음악은 어쩌면 그 뒤에 있는 아프리카라는 공통점과 더불어 부정할 수 없는 스페인과 포루투칼의 차이점의
교감, 좀 더 단순화하면 플라멩코와 파두의 퓨전의 가능성마저 점칠 수 있으나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지만 그저 처음 맞선을
본 듯한 수준 이상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물론 이런 판단의 근거는 페르난도 뚜루에바 감독의 프로젝트, 쿠반 재즈와 플라멩코.베보와 시갈라의 프로젝트의 엄청난
음악적 성과에 따른 기대치 때문일 수도 있다.

 

      영화는 베보가 브라질의 첫 수도였던 살바도르의 빈민가 칸딜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바이아 살바로드, 택시 기사의
말로는 천국이라는 바이아 살바도르의 빈민가로 말이다. 이곳은 흑인 노예들의 피난처였고 흑인 노예들의 전통과
당시 절망적 상황은 교회지구가 들어서는 이유가 되었고 검은 로마라고도 불린다.
유네스코가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곳이기도 하다.

 

      베보를 안내하는 것은 카를리뇨스 브라운Carlinhos Brown 이다. 실제로 칸딜 지역의 음악 운동의 선구자이며 62년생으로
라틴 그래미를 수상하기도 한 비중 있는 음악인이다. 중요하지는 않겠지만 1999년 CNN-Time이 지정한 라틴아메리카 뉴리더로
선정되기도 했다.

 

      사실 영화의 포지션은 좀 애매하다. 음악 다큐도 사회 다큐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있다.

      물론 음악은 모두 아름답다. 또한 라틴댄스를 추는 사람들은 한번 자신의 리듬감을 실험해봐야 한다. 그들의 음악에 면밀히
흐르고 있는 룸바 클라베와 손 클라베를 느낄 수 있다면 또한 그 리듬에 몸을 맡기고 형식을 떠난 자신의 춤,
몸 동작을 해낼 수 있다면 일단 어느 수준을 넘어 선 것이다. 또한 수 많은 타악기의 리듬 속에서 세마치 장단 비슷한 느낌을
끌어낼 수 있다면 그 리듬에 몸을 맡길 수 있다면 또한 상당한 수준의 리듬감과 음감의 소유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추천한다. 한번 자신의 리듬감과 음감을 가늠해보라고)

 

 

 

차노포소가 만든 Blem Blem Blem의 브라질 버전,

베보의 말처럼 클라베 리듬을 나타내는 의성어가 바로 브렘 브렘 블렘이다.

 

      또한 마리사 몬떼, 까데야노 벨로소, 질베루뚜 등 브라질 음악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뮤지션들이 등장한다.

 

      음악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베보 발데스가 재즈와 쿠바를 대표해서 브라질로 갔는데 …. 충분히 더 멀리 갈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페루난도 뚜루에바는 시사적인 다큐에는 그리 재능이 없는 것 같다. 그의 음악적 감수성을 더 살리면 어떠했을까 싶기도 하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인 musico이다.

베보의 피아노와 마리사 몬떼의 목소리가 돋보이는 곡이다.

 

       음악학교 Escola Placatum과 카를리뇨스 브라운의 업적은 충분히 주목 받을 만하며 가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으며 가장 중요한 가치는 빈민가를 주거지로 환경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식에서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영화 안의 인터뷰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아프리카에 대한 언급은 사실 개인적으로 그리 공감되지 않는 것으로 아프리카-흑인이란 공식도 문제이나 전에
언급한 적이 있음으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지만 쿠바인, 브라질인으로 자신을 흑인, 아프리카의 후예라는 정체성이 결과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 그렇게 인종적 정체성이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에 앞서는 것일까 하는 마음과 한편으로는 역시
사회적 차별에 의한 반작용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미국의 흑인 해방 운동을 염두에 둔 포석인가 등등 여러 생각이 겹쳤다.

 

     아무튼 쿠바의 싼떼리아 브라질의 깐똠블레는 비슷한 기원을 가진 것으로 보이나 우리에게는 그저 무당의 신들림,
물론 ‘그저’라는 표현은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혹은 보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무속신앙의 모습이며
그리 특별할 것도 없으나 영화에 등장시킨 이유가 애매했다.

 

      우리가 단군신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저 역사를 유구성을 강조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신화도 전설도 아닌 역사라고 생각한다.)

       전 인류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가치가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떼리아와 깐똠블레의 유상성이 그저 비슷한
기원만을 의미한다면 어떤 신이 있고 세상을 창조했으며 하는 등의 신화가, 그것을 아는 것이 브라질과 쿠바의 흑인, 아프리카에
기원을 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거기에 브라질과 남미와 전 라틴아메리카를 아우르는 가치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애매하기만 했다.

 

      아무튼 칸딜의 기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저 출발점에 섰을 뿐이다. 
이런 프로젝트,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할 것이며 그들의 가치관은 과연 어떤 것이며 어떤 일을 할 지는 여전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덧붙임.

 

      영화는 재미있게도 파니아 레이블이 제작한 다큐 Salsa를 닮아있다. 스페니쉬 할렘의 모습과 칸딜의 모습은 묘하게 닮아있다.
어쩌면 음악운동의 결과는 사회운동으로 70년대에 자리잡은 미국내의 살사의 모습을 반추해보면 어떤 결론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그 다큐가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바로 리듬, 타악기 그리고 아프리카이다. 라틴아메리카가 유럽인들의 상상에 의해
창조된 것이란 의견이 있다. 쿠바와 브라질의 흑인, 혹은 흑인과 비슷한, 더 간단하게는 백인이 아닌 이들이 자신의 편의에 따라
아프리카는 가상의 대륙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2007년에 제작된 까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파두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아쉬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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