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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사는 건전하지 않다. 살사는 야하다. 그리고 건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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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 살사를 추던 초창기라고 할 수 있을 그때에 많은 이들이 살사는 야하지 않으며 오히려 건전하다고 말했다.

 

     2000년 살사가 붐을 일으킬 때도 살사는 건전한 것이라 했다.

 

     2012여전히 살사는 건전하며 야하다는 것은 오해이며 심지어 바차타도 보기보다 야하지 않다고 한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것은 반복될 것인가?? 글쎄 ...

 



대체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바람났다. 바로 춤바람.

일일이 다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건전하다는 말과 다르게 말이다. 뭐 드라마에서 항상 나오는 것이 불륜인데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말을 하고 있다. 건전하다고. 일부 사람들의 잘 못된,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부의 문제이고 전체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이다. 그것도 10년이 넘는 거짓말이다. 살사는 건전한 소셜 댄스도 아니고 댄스 스포츠같은 스포츠도 아니고 그저 자유롭고 본능적인 춤이다. 영화 더티 댄싱으로 비유하자면 숨어서 즐기던 젊은이들의 댄스가 바로 살사의 개념에 가깝다. 물론 본능적이고 자유로운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본능적이고 자유롭게 즐기기 위해선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전거도 처음 탈 때는 좀 배워야 한다. 좀 배우고 나면 자유롭게 탈 수 있다. 두 손을 놓고 아니면 회전을 하는 등의 재주는 더 배워야 하고 더 연습해야 하지만 사실 자전거를 타는데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음악이나 춤은 트위스트에 가깝다. 격식을 차리고 볼륨에서 추는 춤과 대비되는 개념이라면 

더티댄싱은 살사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패트릭 스웨이즈 형님은 영원히 젊고 섹쉬하다. 고인의 명복을 .... 

 

     

살사는 야하다.

 

     그것도 사람에 따라서는 무지하게 야하다. 적어도 건전하지 않다.

 

     하지만 건강하다. 욕망을, 육체적인 호감을 숨어서 혹은 굴절하여 나타내지 않는다.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숨어서 자위하듯 풀어내는 욕망이 아니라 공개된 공간이라 할 수는 없더라도 공동의 공간에서 공개적이며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건강하다. 정직한 육체성과 직설적인 호감은 표현은 폭력이 되기 어렵다. 상대방의 호감에 모두 ‘좋다’와 ‘싫다’를 표현할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숨어서, 굴절되어 표현되는 호감은 폭력이 되기 쉽다. 뭐 부부간에도 강간이 존재한다고 하지 않는가? 뭐든지 숨어서 하면 삐뚤어지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 경험의 부족 탓인지 건전한 삶과 건강한 삶과 욕망에 의해 타락한 삶을 잘 구분 못하는 것 같다. 살사가 지향하는 올바른 길은 다름 아닌 건강한 삶이 되어야 한다. 욕망이 거세된 삶은 요상한 것이다. 적어도 건강하지는 않다. 카바레 댄스와 살사의 차이를 말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살사의 육체성, 그 건강함을 말해야 한다. 살사를 추는 모두가 자유부인이고 자유 남정네이지만 숨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특히 살사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도 이해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어쩌면 이해한다고 믿지만 그것이 실제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누군가 알려준 형()을 재현하는 것이 커플댄스이며 살사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어떤 감정들을, 어떤 메시지들을 서로 나눌 수 있고 교감할 수 있는지를 모를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신의 목소리 없이 외국인의 말투와 어조를 따라하는 외국어와 같은 것이다. 물론 이렇게 외국어를 연습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 언젠가는 자신의 목소리가 생길 것이다. 또 이렇게 춤을 추는 것도 나쁘지 않다. 뭐 언제인지 확언할 수 없으나 언젠가는 자신의 춤 스타일의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형()을 재연하는 춤은 춤이라기보다는 스포츠에 가까울 것이며 이런 스타일의 춤이나 스포츠를 댄스스포츠라고 한다. 살사는 클럽댄스이고 지극히 개인적이며 자유로울 수 있는 춤이지만 항상 이것이 들어맞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댄스 스포츠는 또 하나의 메달 밭으로 등장했다. 건전하며 뭐 운동도 되고 살도 빠지고 이런 장점들은 이제 살사가 아니라 댄스 스포츠에 속한 것이 되었다. 또한 형()을 재현하는 모습으로는 댄스 스포츠에 살사에 견줄 것이 아니다. 뭐 공연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어찌되었건 서로 감싸 안은 두 몸의 한품에서 그리고 마주 잡은 두 손에서 세밀한 밀고 당김으로 많은 동작을 유려하게 만들어내는 살사는 그 자체로 건강하고 섹시하다. 그저 두 사람의 육체만으로 하나의 하모니를 만드는 것만큼 오묘하게 야하고 오묘하게 건강한 순간은 드물지 않은가? 또한 이것이 바로 살사의 마력일 것이다.

 

     물론 그 마력에 빠져 자제력을 잃고 무너지는 것은 그 개개인들이 약하기 때문이다. 살사는 예전부터 그런 특징이 있었고 자제력이 없는 사람들은 매번 항상 넘어지고 무너지고 했던 것이다. 개인의 문제를 전체의 문제로 확대하면 안 될 것이다. 이런 표현이 어울리는 지 잘 모르겠지만 팬티가 보일 듯한 미니스커트와 허리와 가슴도 드러나는 배꼽티를 입은 여자를 본다고 해서, 봤다고 해서 모든 남자들이 성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 자재력이 없는, 이성이 덜 발달한 사람만 그렇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노출 의상을 어떤 여성이 입었느냐도 상당히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라틴계 여성이나 남성에게나 공통된 특징이 육체성이다. 건강한 육체의 건강한 섹시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브라질 리우 카니발의 특징도 바로 이 육체성이다. 살사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삼바와 살사는 약간 다르다. 살사가 저변이 더 확대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 육체성을 어떻게 살릴 것이냐 대한민국이란 환경에서 어떻게 살릴 것이냐 하는 것이다. 물론 현재 대한민국에서 육체성은 아주 중요한 코드이다. 뭐 남녀 아이돌들도 이런 육체성을 표현하는 것을 어떤 코드로 삼고 있으니 말이다.

 

 

 

     결론적으로 건강한 육체가 섹시한 육체 아니겠는가?

 

 

     여기에 메렝게와 바차타 이야기는 정말 사족이다. 요즘은 메렝게에 대한 말은 전혀 없고 바차타에 대한 말은 여러 가지인 것 같은데 바차타를 배워서 춰야 한다거나 어떤 필feel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필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 보이는 것이 바로 바차타이다. 다시 말해 요상한 것이다. 아주 요상하다. 바차타는 사실 우리나라 나이트의 블루스타임과 아주 흡사하다. 카리브 해의 열정을 특히 강조하던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로맨틱한 커플댄스를 위해 감미로운 볼레로를 느린 차차차 리듬으로 편곡하여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 음악과 춤으로의 바차타의 시작이다. 스텝이나 홀딩 모두 밀착된 클래식 홀딩의 메렝게와 닮아있으나 4박자 마지막에 악센트를 주는 것, 콩가로 예를 들면 슬랩으로 치는 것과 같은 느낌인 것이다. 사실 엉덩이를 튕기는 것만이 아니라 탭 혹은 킥 혹은 상체의 움직임으로도 이런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을 다 2차적인 것이다. 바차타는 연인들을 위한 춤이고 로맨틱한 춤이며 그러므로 사랑스럽고 야하고 달콤하고 가끔은 지들끼리 알아서 뜨거워지는 춤이다. 사실 춤이라 부르기도 머쓱하다.

하지만 어떤 눈들 때문에 품안의 여인을 제대로 안을 수도 없는, 그런 바차타나 연인들의 달콤한 춤을 기괴한 동작을 하며 아크로바틱한 느낌마저 주는 것을 좋다고 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바차타를 잘 추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연인의 감정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춤을 추는 것도 좀 이상하기도 하고 보기하고는 다르다, 사실 아무런 느낌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알고 보면 굉장히 슬픈 일이고. 그러고 보면 바차타는 굉장히 애매한 상황이 아닐까? 내 품에서 나를 정말 사랑하는 듯 감싸 안고 있는 여인은 실제로는 아무런 느낌도 없다면, 그저 음악에 맞추어 스텝을 밟고 동작을 하는 거라면 너무 슬플 것이다. 여자의 경우도 자신을 보듬어 안듯 품안에 안고 있는 저 남자가 실제로는 아무런 느낌도 없다면 슬프지 않을까? 물론 단지 그냥 춤을 추는 것이라 강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춤을 추면서 마치 연인인 양 춤을 추는 것이다. 연기를 하는 것이다. ()만 남고 내용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느낌이 좋았다고 하는데 한번 찬찬히 잘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 느낌은 과연 무엇인지, 혹시 좋은 연기(演技)였다는 말이 아닌지 말이다.

 

아무튼 이제라도 살사는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

 

살사는 야하다.

살사는 육체적이다.

살사는 섹시하고 중독되기 쉽다.

그러면서도 자유롭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살사는 건강하다.

건전한 것이 아니라 건강하다.

건강하게 욕망을 표출한다.

 

두 사람의 몸이 서로의 몸을 통해 교감하는 굉장히 아날로그적인 것이며

그렇기에 진실하며 솔직하다.

 

 

덧붙임) 너무 오래전 이라 기억이 확실하지 않은데 배우로도 꽤 이름 있던 분이 바차타의 야함에 대해 솔직하게 글을 쓴 적이 있었고 그 글에 꽤 만만치 않은 비판적 내용의 글이 올라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일 심하게 반발한 사람이 아마 야하기로도 유명하고 이래저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별에 별 동작을 다하는 바차타를 보급한 사람이었다.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두 사람의 논쟁은 큰 부딪침 없이 끝난 던 것 같다.

     화려하고 야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별 느낌이 없는 바차타와 별 동작 없이 내밀한 섹시함을 즐기는 바차타, 둘 사이에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다.



아마 이런 느낌일 것이다. 이것은 경연이며 공연이지만 클럽에서 공연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 않는가!!


     개인적으로는 이미 말한 것 같은데 사족 같지만 다시 이야기한다면 정말 바차타는 애인과 추고 싶다. 아주 내밀하고 섹시하게 말이다. ()과 동작의 유려함과 다이내믹함은 다른 춤에서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뭐 꼭 바차타에서 그 리듬에 그런 동작들을 해야 하다면 그것을 말리거나 막을 방법을 없겠지만,

지극히 개인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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