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잘 모르는 살사이야기 : 남미 대륙의 콜롬비아 남부 도시 깔리가 살사Salsa의 중심지가 된 까닭은 ?
깔리Cali 콜롬비아: 카리브 해의 가장자리에서 다시 핀 꽃, 살사
살사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사가 남미의 춤인 듯 느껴지는, 그런 오해의 중심에는 바로 콜롬비아가 있고 그리고 깔리라는 도시가 있다.
깔리는 콜롬비아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규모 상으로 현재 콜롬비아에서 세 번째 도시이나 18-19세가 커피와 사탕수수 그리고 20세기에는 산업의 발달로 인해 경제적으로 제 2의 도시이며 230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사실 깔리의 발달된 모습은 마치 깔 리가 살사의 중심지(The capital of salsa)라 들어왔던 사람들에게는 약간 뜻밖의 모습일 것이다. 조금 더 토속적인 모습을 기대했을 테니 말이다.
사실 콜롬비아 자체가 상당히 모던한 부분이 많고 인구 중 백인비율 또한 높은 편이다. 그러나 남쪽으로가면 갈수록 흑인 비율이 높아지고 콜롬비아의 남쪽의 에콰도르나 동쪽 베네수엘라에서는 길거리에서 흑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보고타나 메데진같은 도시에서 흑인 비율은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다. 물론 알려진 것과 같이 세계 미인대회 수상자를 수차례 배출한 곳이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모델같은 미인들을 길거리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길거리에서 막 파는 커피마저도 그 향이 웬만한 서울의 커피 전문점 못지않으며 열대 과일 또한 풍성하고 먹음직스럽다.
하지만 거리마다 라틴음악이 울려 퍼지고 몸으로 연주를 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춤꾼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라틴음악의 천국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깔리를 여행하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여기가 살사의 천국, 살사의 수도(首都)로 불리게 되었을까하는 것이다.
이 의문을 풀기위해 첫 번째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바로 쿠바를 비롯한 카리브해 도서지역과 멕시코 그리고 미국,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의 남부지역의 관계이다. 유럽과 교역하는 교역루트로 카리브 해의 도서지역은 아주 주요한 지역이었다. 다시 말하면 19세기까지 유럽의 문물이 처음 머무는 곳도 쿠바를 비롯한 카리브해 지역이었고 카리브해 지역에서 멕시코로 미국으로 그리고 남미지역으로 여러 문물이 퍼지게 되었던 것이다. 쿠바는 당시 아메리카에서 가장 최첨단의 걷는 도시였고 새로운 유행이나 문물이 처음 소개되는 곳이었다.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굉장히 앞선 곳이었고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국가들이 독립을 성취하고 있을 때에도 스페인의 식민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정확히는 1898년 미서전쟁의 결과로 쿠바는 독립 아닌 독립을 하게 되고 또 다른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푸에르토리코와 필리핀 등은 미국의 식민지, 미국령에 속하게 된다. 이후 세계대전을 거치며 세계 강국으로 떠오른 미국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쿠바는 혁명이전까지 여러 부분에서 라스베이거스를 연상시키는 곳이었고 이때 향락산업부분, 춤과 음악 등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당시 쿠바는 우리가 부에나 비스타 쏘시얼 클럽이나 기타 여행 다큐 등을 통해 봤던 쿠바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유행을 선도하는 곳이었고 특히 하바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모던한 도시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라디오 방송국이 있었다. AM방송은 저 멀리 남미의 대륙에서도 전파가 잡혔다고 한다. 라디오를 타고 맘보를 비롯한 당시 최첨단의 음악들이 퍼져나갔다.
카리브해 도서지역의 마지막에 트리니다드 토바고가 있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로 이어지고 그 위로 바로 파나마가 있다. 약간 찌그러진 타원형 모양의 바다가 펼쳐져있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이 지역으로 활발한 교역이 있었다. 그래서 항구를 중심으로 많은 선원들이 오고 갔으며 선원들과 함께 들어온 새로운 음악과 춤 또한 항구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콜롬비아 지도, 부에나벤뚜라와 깔리는 무역거점이기도 했다.
지도의 윗 부분에 표시된 까르따헤나cartagena, 바란끼야Barranquilla, 산따 마르따Santa Marta 등의 지역의 항구가 그 중심지였고 1914년 파나마 운하가 완공되자 깔리에서 가까운 부에나벤뚜라Buenaventura 지역 또한 문화 유입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미국 서부 지역으로 산업의 중심이 이동하면 할수록 북부 카리브해 지역보다 부에나벤뚜라 지역의 비중이 점점 높아졌다.
실질적인 접촉은 항구를 중심으로 한 다소 한계가 있어 보이는 지역에서 일어났으나 콜롬비아 북부지역에서는 쿠바를 비롯한 국가들의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레코드가 항구를 통해 유입되었으며
결정적으로 50년대 멕시코와 미국의 뮤지컬 영화들, 맘보를 연주하고 맘보를 추는 장면이 들어간 영화들을 보기 시작했다. 형식적으로 정의되지 않은 자유로운 맘보의 스텝은 콜롬비아의 클럽 댄스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시에 멕시코와 쿠바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던 맘보를 따라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세계 최첨단 유행을 따라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어떤 면으로 콜롬비아에 살사란 것은 스페니쉬 할렘에서 시작된 살사가 라티노로서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컸던 것과는 다르게 콜롬비아의 살사는 아주 전통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세계적 유행에 따른 것, 어떤 면으로 세계화의 한 형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이 부분이 바로 깔리가 살사의 수도, 새로운 수도라고 불린 가장 큰 이유가 된다.
파나마 운하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여 본다면 파나마 운하 이전에는 카리브해 연안 지역을 거점으로 라틴음악이 퍼지기 시작했으며1) 파나마 운하 개통 이후 부에나비스따2)를 중심으로 라틴음악이 퍼지기 시작했다.
선원들이 소개한 새로운 유행은 아프리카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던 과거의 노예계층과 당시 저임금 노동자
계층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커피와 사탕수수 재배3) 그리고 기타 근대 산업에 종사하던 계층은
낯익은 느낌의 유행에 그리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라이브 밴드의 음악과 함께 라틴음악이 성장한 반면에 부에나벤뚜라 지역을 중심으로 퍼진 라틴음악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레코드를 통해 보급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는 지4), 얼마나 최신 레코드가 많은지가 당시 클럽의 인기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인이었다. 라이브 밴드의 음악이 주는 생생한 느낌을 느낄 수 없다는 단점보다 대규모 악단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은 한두 명의 디제이를 운영할 때의 비용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그래서 디제이가 음악을 선곡함으로 인해 저렴하게 클럽을 운영할 수 있었으며 스피커의 종류와 성능에 따라 약간 다르지만 대규모 악단이 각 악기마다 마이크 세팅 및 믹싱의 과정을 거쳐야 대형 라이브를 할 수 있던 것과는 달리 간단한 설정으로도 대규모 홀에서 음악을 틀 수 있었다. 여기에 대부분의 고객 또한 흑인 및 유색인종 노동계급이었기에 당연하게 저가(低價)로 운영되고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클럽이 자리를 잡게 된다.
레코드로 음악을 튼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할 결과를 낳게 된다. 60-70년대 깔리에서는 새로운 춤의 형태, 살사의 새로운 형태가 갖추어지고 있었다. 맘보에서 영향을 받은 탭과 킥을 이용한 빠른 스텝과 스윙;지터벅에서 영향을 받은 살짝살짝 뛰는 동작들, 그리고 룸바에서 영향을 받은 골반과 가슴을 섹시하게 움직이는
동작 등 전체적으로 다이내믹하면서 빠른 스타일이 깔리의 스타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런 스타일이 자리 잡은 데에는 우선 흑인 이주민과 혼혈 계층의 2-3세들이 열정적으로 카리브해의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잔존
해있던 아프리카적인 문화와 젊은 혈기가 만나 좀 더 빠른 동작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모든 클럽에서 33r.p.m. 레코드를 45r.p.m.으로 틀기 시작했다. 테이프를 빨리 돌리는 것 같은 음악과 춤은 깔리의 상징이 되었고 몇몇 클럽에서는 더 빨리 음악을 틀기 위해 턴테이블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기도 했다.
60년대 후반부터 깔리의 축제에 초청되었던 뮤지션들은 바로 이 속도에 압도되어 깔리를 하드코어 살사의 메카, 수도 등의 명칭으로 부르게 된다. 여기서 바로 살사의 수도라는 말이 유래한 것으로 본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60-70년대 파니아로 대표되는 스페니쉬 할렘에서 탄생한 살사는 그저 라틴 커플댄스 음악이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이란 관점으로 음악을 해석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방식이었고 그 음악과 그 춤으로 다른 이들, 특히 앵글로 색슨계 백인들과 구별되는 자신들의 특징이었다. 게다가 클럽에서의 공연이 아닌 거리와 광장에서의 공연 그리고 수만 명이 들어가는 대형 콘서트 홀, 스타디움에서의 공연은 자연스럽게 커플이 아닌 홀로 춤을 추는 쪽으로 발전하게 된다5). 라틴 커플댄스에서 어떤 경우도, 심지어 남녀가 홀딩을 하지 않은 채라도 둘만의 교감으로 춤을 추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대규모 공연은 이것을 바꾸게 된다.
뉴욕의 살사는 하나의 운동이었고 문화적 붐이었고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이었으나 깔리에서의 살사는세계적인 어떤 것, 혹은 범 라틴아메리카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속도와 리듬감, 다이내믹함이 강조된 탓에 깔리의 살사 스타일도 남녀가 홀딩을 하지 않은. 오픈된 상태로 춤을 추는 것이 유행하였다. 뉴욕에서도 깔리에서도 살사는 그저 라틴 커플댄스가 아니라 음악을 해석하고 몸으로 반응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70년대 살사의 붐은 파니아 올스타즈의 양키즈 홈구장 콘서트에서 절정을 이룬다. 하지만 모든 붐이 그렇듯 이후 꺼질 줄 모르던 살사의 붐은 속절없이 사라지고 라틴 클럽댄스는 디스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현대적 메렝게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또한 광장과 거리에서 문화적 운동처럼 성장한 살사는 다시 클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고 많은 살사 뮤지션들은 대중적 스타에서 클럽 댄스음악 뮤지션으로 위상 변화를 겪게 된다. 게다가 80년대 마이클 잭슨으로 대표되는 MTV 시대가 열리면서 미국에서 그리고 다른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살사는 적어도 최신 유행이거나 들으면 가슴이 뛰고 자신의 누구인지 알려주는 음악이아니었다. 그저 친숙한 오래된 유행가가 된 것이다.
이때 다시 모순적 관계가 재현된다. 흑인 및 유색인종 노동자 계급에서 유행하던 살사가 점점 저변이 확대되어 콜롬비아 출신 살사 밴드들이 등장하게 되고 노동자들이 추는 춤이라는 인식 또한 점점 변화하게 되어 예전보다 좀 더 대중적인 것으로 변하게 된다. 또한 경제 성장과 발맞추어 일 년에 2-3회의 대형 카니발이 개최되고 뉴욕을 비롯한 기타 예전 살사의 중심지에서 일어났었고 80년대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대형 살사공연이 깔리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상황이 바뀐 것이다. 파니아 올스타즈를 비롯한 살사 뮤지션들만이 아니라 조 끼하노Joe quijano, 조 쿠바Joe Cuba와 같은 맘보/빠창가Pachanga 뮤지션들도 자신들이 30여년 전에 발표했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깔리를 찾았다. 물론 하드코어 살사의 중심지는 당연히 깔리였다. 하지만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깔리는 명실상부한 살사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다. 사실 이렇게 살사가 깔리에서 성장하는데에는 살사 축제la feria de la salsa가 도시 전체 규모로 이루어지고 어느 정도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관광 수입을 올리고 있다는 현실적인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후 다시 쿠바음악이 세계적인 관심을 받지 못했다면 살사의 중심지로 깔리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다시 불어온 라틴음악의 열풍은 결국 쿠바에서 타오르게 되고 어떤 부분에서는 점점 꺼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항상 깔리는 마치 베일에 싸인 신부처럼 얼굴을 보고 싶은데 볼 수는 없는 존재처럼 막연했다. 더군다나 매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월드 살사 컴피티션에서 마치 곡예와 같은 모습을 보이며 우승을 하는 콜롬비안 댄서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궁금증은 점점 커졌으나 누구도 시원하게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콜롬비아를 여행하기 전에 가졌던 가장
큰 궁금증은 바예나또에 관한 부분과 깔리의 살사, 그 유래와 역사에 대한 것이었다. 바예나또의 비밀은 레코스샵에서 바로 풀렸다. 이것은 멕시코에서 생산되는 용설란 발효 증류주 중에서 떼낄라시를 비롯한 과달라하라주에서 생산되는 증류주를 떼낄라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콜롬비아 북부 카리브해지역에서 사랑받는 트로피컬 음악의 총칭이었다. 하지만 살사에 대한 부분은 상당히 어려웠다. 카니발 시즌도 아니어서
큰 행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길거리에서 살사음악을 듣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사실 깔리에서도 살사음악을 듣는 것, 아니 살사 클럽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살사떼까라 부르는 살사클럽들은 모두 도시 외곽에 있었고 도시 중심에는 일반적인 나이트 클럽들이 많고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쪽으로 그리 크지
않은 클럽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우연히 만난 전문댄서들과의 대화와 민족음악연구 보고서들과 기타 깔리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 등을 보면서 어렵게 어렵게 깔리의 살사, 그 비밀을 풀 수 있었다.
물론 깔리의 살사 스타일이 바로 콜롬비아 스타일이며 또한 꿈비아 스타일이라 부를 수 있으며 이 스타일은 굉장히 독창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정답이라 할 수도 없다. 스텝이 빠르고 현란하고 마치 뛰는 듯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템포에 대한 부분을 제하고 나면 뉴욕과 푸에르토리코를 제외한 다른 라틴 아메리카의 일반적인 경우, 맘보의 다양한 스텝이 룸바, 단손 등과 만나서 형성된 경우와 거의 흡사하다. 더욱이 5-60년대 멕시코 영화에서 영향을 받은 탓인지 멕시코에서 일반적으로 추는 살사와도 아주 닮아있다. 많은 사람들이 콜롬비아의 살사가 영향을 미친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물론 원조가 어디이고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은 그리 발전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현재 콜롬비아 깔리 출신의 살사 댄스팀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 폭발적인 스타일과 템포는 전 세계 공연 살사를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깔리에서 살사 댄서들과 뮤지션 그리고 여러 살사 행사들는 여러 방면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현재같은 상황이 이어진다면 아크바틱하며 다이내믹한 깔리 스타일 살사는
한동안 세계를 재패할 것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살사클럽에서 사랑받는 음악은 라틴 재즈 스타일의 약간
느린 템포의 곡이다. 깔리는 항상 역설적인 관계인 것 같다. 세계적 유행을 따라가는 것, 세계화의 한 형태로 소개된 라틴음악과 라틴댄스가 이제는 깔리의 정체성이 되었으니 말이다.
파나마 운하 개통 이전의 라틴 아메리카의 해양 무역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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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결과 생겨난 것이 바예나또인데 바예나또 또한 살사와 흡사하게 뭐라 정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2) 현재도 콜롬비아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다.
3) 플렌테이션 농장을 위해 노예가 필요했던 것이다.
4) 저전력 트랜치스터와 돌비 스테레오 사운드가 상용화된 후에는 라이브 연주에 못지 않은 생생함을 느낄 수 있었다.
5) 이것을 콜롬비아의 꿈비아 영향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콜롬비아의 전통 꿈비아는 남녀가 홀딩한 채로 빙글 빙글 도는 방법으로 춤을 추었다. 그러므로 커플댄스, 카리브 해의 문화적 자양분이 이 지역에 새로운 결과는 낳은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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