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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막 카우사이의 개념과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의 주요 개념 비교를 통한 영토와 우리의 땅에 대한 관점의 변화

Latin Feel/문화 이야기

by Deko 2014. 2. 13.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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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막 카우사이의 개념과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의 주요 개념 비교를  

한 영토와 우리의 땅에 대한 관점의 변화   




최명호(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 교수)


     2008년 에콰도르에서 자연권 혹은 자연의 권리(Los derechos de la naturaleza)가 명시되면서 수막 카우사이는 하나의 대안처럼 언급되기 시작했다. 자연이 인간의 유용성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본질적인 가치가 있다는 점을 헌법이 인정한 것이라(Acosta y Esperanza martiñez, 2011,p.11) 평가하는 등, 이것이 마치 하나의 혁명적 사건으로 간주하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약 5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실질적으로 어떤 현상을 야기했는지 아닌지는 여전히 논쟁적인 부분이다. 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수막 카우사이는 근대 국가 3요소, 주권, 국민, 영토 중 하나인 영토에 대한 강조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현재 국적이라는 것은 개인의 필요에 의해 획득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이고 식민시대 이전 그리고 식민시대 스페인의 식민지배에서 독립 후 각 근대국가들의 수립까지 각 단계별 거대한 간극이 있는 역사를 지닌 라틴아메리카의 다양한 국가들의 상황은 우리나라처럼 같은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다는 믿음이 강한 동북아의 다른 국가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관점으로 식민시대에 대한 개념이나 인종을 민족의 개념으로 해석하게 되면 사실과는 동떨어진 이해를 하기 쉽다. 쉬운 예로 라틴아메리카의 국가주의는 정치 체제로는 독재와 20세기 초의 제국주의와 파시즘과 연관을 맺고 있고 민족주의는 원주민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하지만 동북아에서 민족주의는 국가주의와 구분이 안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단어의 유사성에 의해 상이한 것을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순간부터 오해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연방주의와 남아메리카의 연방주의를 동일시하는 것과 같은 오류이다.

     또한 원주민주의 혹은 원주민 중심주의에 기반을 둔 사상이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사상으로 대두되게 되면 이것은 또 다른 소외를 야기할 수 있다. 각 국가별로 차이는 있으나 20%를 넘지 못하는 원주민들의 사상이 그 국가와 대륙을 대표하는 사상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 외의 인종을, 메스티소, 백인 또한 흑인과 그 외 혼혈인종이 소외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적어도 60%이상의 메스티소가 살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국가 내부의 역차별이며 메스티소에게 자신의 DNA 반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원주민들의 문화는 소중하고 보호해야할 대상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한 국가를 대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꼬르떼스를 지워버리고 말린체만을 주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백인우월주의의 비뚤어진 패러디일 뿐이다. 순혈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원주민중심주의와 백인 혹은 서구유럽 중심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게다가 혼혈이라는 가능성, DNA 자체에서 유래하는 두 세계 혹은 그 이상의 세계를 담을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꼭 민주주의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다양함이 스스로의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 배타적이기 않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유토피아의 가장 단순한 모습일 것이다. 다시 말해 다양한 혼혈을 통해 가시적으로 보이는 다양성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그리고 우열의 법칙을 생각한다면 신의 축복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 ‘물질적인 진보 속에서도, 그 풍요로움 속에서 왜 빈곤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가?’ ‘여전히 지구의 한쪽에서는 기아로 죽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간헐적 단식을 말하며 비만과 과체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다. 15세기 말, 라틴아메리카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된 상업혁명과 산업혁명 이후 전 세계가 그 이전의 세계와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물질적 풍요 혹은 진보를 이루었지만 실제로 그 물질적 풍요가 선진국의 경우에도 일반 노동자들에게 돌아가고 있지 않으며 국제적으로는 일부 국가들에 집중되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물질적 진보를 성취한 국가들 내부에서 더 극심한 궁핍과 가난이 만연해있으며 그것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제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도 마찬가지이며 이것은 가시적으로 표현된 것이 아마도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일 것이다. 99%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금융위기는 부의 불균형이 미국 내부에서 얼마나 극심한가를 가시적으로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

     헨리 조지의 이론은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으나 여전히 눈 여겨 볼 부분이 있다. 헨리 조지의 이론을 간단히 표현하면 생산물 혹은 총 이윤이라는 것은 지대와 임금과 자본의 투자 이익이므로 결국 총 이윤에서 지대를 제외하면 임금과 자본의 투자 이익이므로 생산력의 증가 혹은 물질적 진보가 아무리 이루어진다고 해도 이와 함께 지대가 상승한다면 임금과 자본의 투자 이익은 절대 상승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헨리 조지의 지대 개념은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낼 수도 없고 증가시킬 수도 없는 자연적 요소를 사유권의 대상으로 만든 것에서 발생한 독점의 대가라고 한다. 이 독점의 대가가 교환가치를 갖는 다면 언제나 지대가 존재하는 것이다. 헨리 조지는 바로 이 독점의 대가, 혹은 토지로 인한 모든 불로소득(不勞所得)을 조세 형태로 환수하게 되면 임금과 자본의 투자 이익이 증가하게 될 것이며 임금과 자본의 투자 이익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도 정부의 재정을 꾸려갈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모든 세금을 철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의 시각에서 자본 혹은 자본의 투자이익, 통화, 환율 등의 수단을 통해 자본의 투자 이익은 그저 단순한 투자이익으로 볼 수 없는 상황이기에 지대에 대한 과세를 통해 모든 세금을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은, 특히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국가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조지의 관점은 혁신적이고 현실적인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며 특히 우리나라처럼 부동산 버블이 문제가 된 국가들의 경우에는 더 강한 울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자본과 노동에 중점을 두었던 주류 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 중 어느 곳에서도 헨리 조지의 사상은 환영받기 어려웠다.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모든 것을 ‘지대’의 개념으로 환원하면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철학적 생태학 혹은 윤리적 생태학이 그것이다. 수막 카우사이에서 말하는 대지의 여신 등의 원주민의 신화와 종교에서 유래한 개념은 그 자체로는 그리 특이한 것이 아니다. 농경문화를 겪었던 문화권에서는 보편적으로 나타는 것으로 여기에는 동서양의 구분이 없다. 하지만 이런 개념이 한 국가의 헌법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 영토의 개념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거나 혹은 변화를 목표로 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굳이 공동체주의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농경문화에 널리 퍼진 대지의 여신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신의 젓을 마시고 사는 존재로 모두가 혹은 그 단위 공동체가 하나의 가족이며 형제이고 자매이다. 모자(母子) 혹은 모녀(母女)간의 일체성은 자연을 하나의 타자적 존재로 보며 대상화하는 인식론적 관점이나 계발의 대상으로 보는 물리적 진보의 관점을 일순간 넘어서게 된다. 자연의 부모(父母)이며 생명의 원천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모두 대지의 아이들이 되면 각 개인이 토지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도 더 나아가 일국이 자신의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도 유교적 관점으로 보면 아주 불효(不孝)한 행위가 된다. 권리를 중심으로 보면 인류는 생명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욕구를 제외하고 개인과 국가의 소유권이나 대자연의 풍요와 다양성을 감소시킬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한 개별 국가의 역사가 얼마까지 이어질 지 가늠할 수 없으나 적어도 국가로 존속되는 기간 동안 국가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 중 하나인 영토를 이후 세대들도 점유할 수 있다는 것, 영위하며 생활해야 하며 더 나아가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한 개별적 유기체로서 인간, 혹은 시민 국민의 한 사람이, 한 세대가 사망한다고 해도 영토는 존속되어야 한다는 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확실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말 그대로 등대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모든 사적 공적 사업을 비롯하여 경제구조를 혁명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혁명적 변화는 혁명적 반작용 혹은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물리적 환경에 대한, 제도에 대한 혁명적인 변화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사고의 변화이고 사고의 변화는 아무리 혁명적이라고 해도 실제 변화의 수단에 민주적이며 공리적이며 합리적 고려가 선행된다면 있을지 모르는 부작용을 예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헨리 조지가 토지에 대한 모든 사적 소유권을 폐기하자고 주장하지 않고 조세의 방법을 통해 지대의 비율을 줄여가고 그래서 지대의 비율이 제로가 된다면 임금과 자본의 투자 이익이 증대될 것이라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임금과 자본의 투자이익이 한 개인에게 돌아가야 할 것인가 공공성을 고려해야 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인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자연(自然)을 보는 인간의 관점이다. 바로 여기에 녹색발전, 녹색성장의 시대적 필요성이 있다. 한시적인 이익, 효율성의 관점에서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호혜적 이타성을 기본으로 한 항구적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시대 혹은 미래의 시대 과제라면 그 수단으로 현재는 녹색발전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이 땅에서 반만년 이상의 시간을 살았고 우리 민족을 살리고 키워낸 터전이 우리의 땅이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생존과 경쟁의 발전의 시대가 물리적 진보를 이루어냈었다고 해도 유교적 관점으로 보면 우리 땅에 대한 불효의 시기였다. 이제 효의 길로 돌아서는데, 우리의 땅, 대지 대한민국의 영토, 그 공간 안의 모든 존재와 호혜적 관계를 만드는데에 수막 카우사이와 헨리 조지가 만들어낸 울림은 가시적 모습으로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우리의 관점을 바꾸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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