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의 또다른 심문 Otras inquisiciones가 만리장성과 책들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학부에서 그리고 대학원에서 보르헤스에 대한 텍스트를 참 너무나 많이 보았었다.
어쩌면 내 대학/대학원 생활에서 보르헤스를 뺀다면 사실 뭐가 남을 지 잘 모를 정도로
내 삶에서 한때 그가 차지했던 비중은 작지 않았다.
특히 만리장성과 책들은 대학원에서 공부했던 텍스트의 내용이라 더더욱 관심이 간다.
물론 대학원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다른 분들이 너무나 뛰어나서 난 그저 한발 올려넣고
무임승차한 것과 다름이 없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보르헤스가 내게 무엇이었는지 당시에 그렇게 가슴을 뛰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의 작품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기엔 아마도 내가 실력이 너무
짧았던 탓에 달을 가르키고 있는 손가락을 보기도 바뻤다. 그런데 달은 어떻게 쳐다볼 수
있었을까 ...
개인적으로 '만리장성과 책'이라는 텍스트는 장정일의 중국에서 온 편지와 비교했던 작품으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특히 장정일이 보르헤스를 언급한 텍스트를 찾기 위해 서울의
책방이란 책방을 뒤지던 기억, 종로대형서점에서 청계천 헌책방들로 이어지는 여행아닌 여행
아마도 헌책방들을 돌아보는 여행은 도서관에서 책을 찾는 여행보다 다이내믹하며 더 복잡한
훨씬 미로틱한 경험일 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도서관에서 책을 찾는 경험은 무엇보다
도서관이란 우주를 상징하는 듯 하지만 그 자체로 한계가 있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종로와 청계천 책방 헌책방들의 여행은 순간적으로 공간과 시간이 얽힌 8차선 도로변에서
한쪽 구석으로 돌면 바로 60-70년대의 풍광이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의 여행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원하는
책을 발견했을때의 기쁨이란 ...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
아무튼 정경원 선생님께서 만드신 이 책,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
근데 웬 미학 오디세이 3권 ..??
미학 오디세이 3권을 이끌기 위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외에 디오게네스를
등장시킨다. 바로 알렉산더에게 꺼져 ~!! 라고 말했던 개같은 철학자 견유학파의
디오게네스말이다.
디오게네스의 등장이 21세기형 후기 구조주의던 해체주의던 혹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던
모더니즘 이후의 상황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것인데 ....
디오게네스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이다.
억울해도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 하나 ...
보르헤스 작품의 독자로 우리나라의 최고 독자가 진중권, 우리나라 대표적 좌파 지식인 진중권
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 적어도 나는 보르헤스가 유명하다 대단하다 이 텍스트엔 뭔가가 있다 등등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게 보르헤스는 그냥 보르헤스가 아니라
보르헤스 선생님이었으며
그의 이름의 무게에 일단 기가 죽은 채로 굳은 독서를 했던 것 같다.
거기에 비해 진중권의 독서는 자유롭다. 자유롭고 편안하게 놀면서 자신의 상상력과 배경지식
과 함께 편안한 독서를 하고 있다. 그리고 미학 오디세이 3권의 영감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보르헤스가 포스트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불리는 것은 그의 문학적 혹은 미학적 장치
테마때문이다.
보르헤스는 복제와 복제, 원본이 없는 상황을 결코 즐기지 않았다. 탄식하듯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이야기 하지만 그것을 최대한 숨기도 싶어했다. 이것은 마치 블레이드 러너에서
자신을 만든 창조주를 만나기는 했으나 생명을 연장시킬 수는 없는 안드로이드의
심정과 비슷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장미의 이름의 호르헤 신부는 보르헤스를 닮아있다.
the sublime ...미학 오디세이 스타일로 말하면 바로 이 숭고란 것은 인간적인 것을 초월한
것이다. 인간적인 것에는 과학과 지성도 속할 것이다.
질서를 넘어서 만난 카오스 앞에서 절망하는 인간. 절망의 심정도 숭고미에 들어갈 수
있을까?? 어쩌면 미학에서 말하는 숭고의 핵심에는 절망이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형식도 내용도 모두 무너지는 경외감[敬畏感]의 마지막에는 결국 절망을 만날테니 말이다.
보르헤스는 재미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회의주의자인 보르헤스와 절망이란 감정을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의 텍스트에서 느껴지는 짙은 회의주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조용히 말하고 있다.
다시말해 크크크 웃으며 트릭을 만들고 장난을 하고 놀이를 한 사람이 아니란 것이다.
거대한 카오스에서 절대적 자유를 느낀 것이 아니라
아마도 절대적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최후의 모더니스트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이것이 디오게네스와 보르헤스의 차이가 아닐까 ??
아무튼 ...
오늘은 웬지 그가 좀 측은하게 생각된다.
Jorge Luis Bor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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