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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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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라고 할 수 있으나 영화를 보는데에 크게 문제는 되지 않을 듯..)

과연 감동 멜로일까??



소년은 여인에게 책을 읽어준다.
그리고 사랑을 나눈다.

16세 소년과 36세 여인의 관계, 20여년의 차이.
아무리 연하가 대세라고는 하지만 좀 과하다 싶기는 하지만
요새 조숙한 아이들이 많고 과학이던 미용의 탓으로 20세같은 30세들이
많으니 뭐 불가능하지는 않겠다 싶기도 하다. 
게다가 '개인교수'등의 영화에서 무수히 다루어진 성적 환타지 중의 하나
사춘기 소년과 농염한 여인이라는 테마를 다룬 것인가 .... 예상도 했었으나
헛헛 ... 실없는 웃음, 본인만 아는 웃음만 조용히 ... ^^



영화를 보고나서 찜찜한 부분이 있었다. 어떻게 설명하기 어려운 ,.,
그건 뭐야..?? 대체 왜 그런거야 ??

감옥의 여인에게 녹음된 테이프를 보내는 남자의 행위, 심리.

통속적, 일반적인 로맨스라면 지워지지 않는 첫사랑에 대한
식지않은 열정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하는데 
다시 만난 그들의 모습은 그런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이 이야기는 일반적인 로맨스,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이야기라고 강변하시다면, 적어도 일반적인 로맨스 소설의 구조를 따르지 않고
있다는 점에는 긍정하실 것이다.)

여기서 역사가 끼어든다.

세계 2차대전과 나치 그리고 유태인 학살.

영화에 진행상 주인공들의 만남이 먼저이고
이후 세계 2차대전과 유태인 학살이 순서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고 더 나아가 마이클과의 만남과 문맹의 문제로
결국 수용소에 취직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시간 순서상으로 보면 ,
1943년경에 유태인 학살의 사건이 있었으며
1957년경에 남자주인공 마이클을 만났고
1966년 마이클은 대학생 그녀는 법정의 죄인 입장이었으며
1976년 딸과 고향으로 돌아와서 테입을 보내기 시작했고
1988년 그녀는 자살로 생을 마치게 된다.
1922-1988년 ...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그해에
그녀는 죽은 것이다.

그리고 1995년 자신의 딸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시간상의 구성은 이렇다. (시간상으로 사건을 나열해도 이 작품이 지향하는 지점이 보이지
않는가>>)

그녀는 21세정도의 나이에 그런 일을 겪었던 것이다.
아니 그런 일을 했다고 해야 하나?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글을 읽지 못하는 21세의 여자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선택한 일이라 ...
좀 독하긴 독하다.

사실 어떤 말로도 제국주의의 만행과 전체주의의 폭력성을 변호할 수 없는 없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국인 우리나라 사람으로 이런 테마 자체가 좀 꺼림직한 것이
사실이다.

뭐 어찌되었건 소년의 첫사랑이었던 그녀, 한나는 이미 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300여명의 죽음을 방관하였으며 수용소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았던
것이다. 이야기를 듣던 그녀, 소녀와도 같은 눈빛을 가진 그녀가 말이다.



이야기게 몰입한 눈빛






무언가를 상상하는 소녀같은 눈빛, 그리고 300여명이 불타 죽는 것을 그저 방관한 사람의 눈빛





물론 이 영화를 그저 가슴 저미는 사랑이야기로 보는 것도
개개인의 선택이니 뭐 말릴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뭐 논리를 넘어선 사랑, 이유없이 흐르는 눈물 ... 등등의
이야기는, 쉽게 단견, 짧은 생각 혹은 20자평, 50자평에 해당하는
파편적인 코멘트는  피해야 할 것이다.

감상이라는 행위자체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에
설명을 붙이는 것이고 이유없어 보이는 행위들에 이유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포스팅을 하려 한다면 말이다.

각설하고 한나는 실존하는 여자라기 보다는 여러가지 상징성이 있는 여인이다.

일단, 너무나 성실하며 씼는 것도 너무 좋아하고
외부세계와는 교류는 전혀 없는 것 같으며
글을 모른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일용직 비슷한 직업만 전전하며
16세 소년을 스스럼없이 성적으로 유혹하며
육체적인 관계에 그렇게 쉬웠으나 그외엔 교류가 없다는 것도
참 특이한 면이다. 그렇다고 정신적인 교류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문학을 세계를 분명히 함께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소녀적인 감수성을 가진 존재라 ...

마이클은 너무나 인간적인데 비해 한나는 너무나 비현실적이란 것이
의도적인 설정이라면 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온다.

세상은 법으로 지배되며 법죄행위는 법에 위배되는 행위이며
범죄행위의 의도를 증명해야만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세상은 도덕이 아니라 법에 의해 지배된다. 

참 묘한 뉘앙스가 느껴진다.

나치의 법률하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은, 아니 오히려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이
전쟁 이후 범법행위가 된다는 것,
한때 40%가 넘는 지지를 받는 당에서 독일의 유일당으로 그리고
전쟁 후 법적으로 그 활동과 존재 자체가 금지된 나치 ...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인종 차별적인 종족법에 기반을 두고
행해진 나름, 그 당시 기준으로는 합법적인 행위였다.
물론 그 법은 나중에 폐지되었지만 말이다.

더 중요한 것은 법적으로 죄를 물을 수 없다란 부분과
도덕적으로 죄가 있다란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국가란 조직은 법으로 다스려 지고 있다고 하지만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도덕이란 것이 있다.

여기서 글을 쓰고 읽는 다는 것에 대한 상징성이 등장한다.
그리고 루가치와 프라이의 이론가 같이 사람의 목소리로 전달되는 이야기 (Romance)와
책을 혹은 소설의 차이점을 생각해보면 한나라는 여인의 상징성이
쉽게 드러난다.

마치 선악과를 먹기전의 사람과도 같은 순수함을 가진 무지한 여인.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과 감각들, 역겹다거나 기쁘다 슬프다 (이야기를 듣던 반응들)
등은 있으나 무엇보다 자신의 생존이 중요하고 인류 보편적인 판단은 불가능한
섹스 이외의 소통 수단이 없는 한 여인 ... 이것이 어찌 한 여인의 모습이겠는가 ..??
나치의 깃발 아래 이성을 읽어버린 독일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

사실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주인공 마이클이 한나를 그리고 한나가 살아던 시대를
치우침없이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이다.

그 시대에 대한 애정으로 테이프를 보내고
그 시대에 대한 혐오로 한나의 답장을 구석 조그마한 서랍에 팽겨치고
게다가 발로 차버린다.
연민과 혐오의 모습, 한나에 대한 것이면서 독일의 과거에 대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영화속에 수용소가 2000개라는 말도 나오듯이 어디 나치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 사람이 당시 독일에 있겠는가 ..?
모두가 공범아니겠는가 ?
결국 한나의 진실을 침묵한 마이클도 공범이 아니겠는가 ?
법정에서,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도 잘 알지 못하며 사실을 이야기하는 
한나의 순수성에 그녀만을 중범으로 몰아가는 다른 간수들과 
침묵한 마이클은 강한 대조를 이룬다. 
사실 비겁하게 순간을 넘기려 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도덕성이 있기 하겠는가??
전체주의에 물든 사회나 전체주의를 정죄하려는 사회 모두, 법에 의해 운영되며 
도덕성과는 그리 관련이 없어 보이지 않는가??
(한나를 동정하고 다른 간수들과 법관들에게 혐오의 느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원래 반대가 되어야 하지 않은가 ..? 정의가 어디더라 ..?
뭐 이런 질문말이다.)
 

이런 복잡함은 한나를 만나는 순간, 교도소로 가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애정과 혐오 ..
한나에게도 자신에게도 동시에 적용되는 이 두 감정.
이 둘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 마이클 손에 들려있는 꽃다발이 해답이 될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그저 숨겨야 하는 과거, 그 과거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긍정과 부정을 넘어선 대긍정의 이야기가 95년 자신의 딸에게
들려질 것이다.

메타픽션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딸이 이 글의 기록자가 될 것이며 아니면 말하는 순간이 바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 딸에게 들려지는 이야기가 바로 이 영화가
될 수도 있다.

나치와 유태인 학살 등으로 대변되는 감추고 싶은 과거,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견딜수 없었던 그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또한 자신의 양심을 기준으로 
봤을때 악惡이 결국 자신의 가족이며 자신의 연인이며 또한 바로 그 자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지만 이혼을 알리면서 고향에 돌아오기 힘들었다는
마이클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마이클의 집안도 직-간접적으로 나치에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고(그래서 장례식에도 오지 않은 것일 수도) 고향에 돌아왔다는 것이
한나에게 테이프를 보내는 시기와 같으니 한나의 상징성과 고향의 상징성이
아주 흡사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더 리더, 책을 읽어주는 남자]는  세대와 세대가 서로 인사하는
서로를 안아주는 이야기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나의 자살이란 것이 ... 글을 읽게되고 역사를 알게 되고
주변과 소통하며 죄의식이란 것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소녀의 책마저 읽은 것이 아닌가 싶다.
글을 읽는 다는 것의 상징성과 보편적 양심이란 것의 관계성이라 ...

한나에게 마이클에 대한 기억이란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 보다,(어차피 이야기야 수용소에서도 소녀들에게도 들었던 것이니)
주변의 이목과 일반적인 도덕, 그 모든 것을 넘어선, 마치 격리된
어떤 면으로 둘만의 에덴동산의 남녀와 같은, 마치 선악과를 먹기전에 남녀의 모습이며
마이클은 천일야화의 세라자헤데와 같은, 물론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섹스를 하는 것은 차이가 있긴 하지만.이야기 속의 세계로 안내하는  
그런 현실을 넘어선 마치 한 여름의 꿈과 같은 존재, 그런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런 존재가 거리를 두면서 시대적 양심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이다.
낙원은 깨졌다.
그녀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었겠는까?
죽음말고는 ...

그런데 그렇게 친일활동을 하고
현재에도 부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에겐
과연 이게 씨알이나 멕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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