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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와 가라테 원류 논쟁의 새로운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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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태권도 원류가 무엇인지에 대한 포스팅도 꽤 있었고

같은 테마의 게시물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태권도가 우리나라의 국기이며 올림픽 종목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군대에서

원하던 원치 않던 태권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일제시대에 들어온 가라테가 태권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가라테와 의복에서 초기 품형까지 흡사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닌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명칭의 흡사함으로 관계가 있을 것이라 짐작되는 태껸과 태권도가 다른 것은

그저 한번 보기만 해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며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일문 문화 특히 일본 제국주의 적인 문화에

반감이 만만치 않은 우리에게 가라테가 태권도의 모체라는 것은

상당히 받아들이기에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무인 곽원갑, 엽문 등의 영화에서 중국의 쿵푸와 대결하는

일본의 무술로 등장하는 것이 유도도 아니고 유술도 아니고 바로

가라테이다. 아시아권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무술로 가라테가 등장하는 것이다.





무인 곽원갑과 엽문의 장면, 도복이 흡사한 것은 정말 부정하기 어렵다. 또한 두 장면이 상징하는 것은 일본제국주의와 중국의 대결이다.


이러니 태권도와 가라테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혹은 극적인 반전이 시작된다.

가라테는 일본 오끼나와 지방에서 발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끼나와 지방은 19세기 일본 메이지 유신 때에서야 일본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이전까지는 독립된 왕국 혹은 반독립 왕국으로 중국 조선 왜 등과 중계무역을

했다고 한다.

이 오끼나와에서 가라테는 17세기 정도에 형성되고 19세기 말에 일본에 알려지고

20세기 초에 일본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일본을 기준으로 보면 그렇게 긴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다.

또한 일본에서 가라테를 받아들인 시기와 우리나라에 가라테 도장이 생긴 시기에

그렇게 큰 차이도 없고 오히려 일본이나 우리나라에 무기를 갖기 않고 하는 무술로서

그 시작은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형성과정은 다분히 차이가 있어 직접적이며 종속적인 관계로 보는 것은

약간 문제가 있어 보인다. 태권도는 우리 마치 다리를 손처럼 쓰는 방향으로

다시 말해 발차기 위주로 발전했으며 이 과정에서 일반인들이 즐기던 태껸의 영향이

없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또한 일본의 가라테는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 등과

결합하여 일본의 방식으로 발전했고 그 단면을 초기 K-1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여기에 있다.

거의 신석기 시대와 다름 없었던 오끼나와가 13세기 혁명에 가까운

변화를 한다. 그리고 류큐왕국이 성립하고 오끼나와 섬을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하게 된다.

2009년 4월 20일 방영된 역사 추적에서 고려 삼별초의 마지막을 추적하였고

그 마지막은 바로 오끼나와였다.

역사적 유물로 고려식의 기와와 건출물, 삼국시대 양식의 성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제주도에서 마지막 농성을 하던 삼별초는 이전에는 제주에서 전멸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일부, 재기를 노리던 삼별초의 정예부대가 오끼나와로 이주한 것으로 보이다.

이후 오끼나와는 석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농경이 시작되었고 이후 14세기 부터는 해상 교역으로 부유해졌다고 한다.

 



너무 멀어보이긴 하나 해류와 파도가 좋아서 현재도 오끼나와 앞 바다에서 우리나라 쓰레기 소주 병등이 발견된다고 한다.








류큐대학 교수의 고백(??) 사실 이들은 이미 예전에 다 알고 있었다.




삼별초는 원나라와 원나라에 항복한 고려군과 싸우던 고려 최고의 정예부대이자 전사들이다.

그들이 철기와 농경기술 그리고 고려의 특징인 해상무역 등만 오끼나와로 가져갔겠는가?

죽어간 전우들의 넋을 기리며 재기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무예가 오끼나와에 뿌리내렸을 것이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태권도나 가라테나 그 특징이 직선적이며 빠르고 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라테가 일본 군대에서 쉽게 퍼질 수 있었을 것이고

현재 우리나라 군대에서도 태권도를 배우는 이유일 것이다.

어찌 보면 그 느낌이 마치 총검술과 비슷하다. 빠르게 때리고 체중을 실어

직접적인 타격을 주는 것이 말이다.

대개 개인의 건강과 호신을 위해 배우는 무술은 쿵푸가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만

일단 동작이 화려하고 부드러우면서 유연성이 강조되고 어찌 보면 춤인지 무술인지

구분되지 않는 경향이 있고 무엇보다 유희적 성격이 있는데 비해 태권도는 이와 다르다.

일대 일의 대련에서의 실전성 보다 오히려 전장에서의 실전성으로 보일 정도의

모습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재현하지 못하는 고려의 삼별초군 무술 더 나아가 신라 그리고 발해 등에서

전해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혹은 그 이전의 고구려 군대의 무술이 어쩌면

오랜 시간을 돌고 돌고 돌아
다시 우리에게 태권도란 이름으로 돌아온 것일 수 있는 것이다
.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뒤를 이은 것이며 무인정권 시대는 일본의 전국시대 못지 않는

무인들이 가장 우대받는 즉, 개인의 무예로 출세할 수 있는 시기였으며 이것은 사실

태왕이 직접 전장으로 나가 친정을 하던 고구려의 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다.

 

새로운 역사적 발견은 우리에게 또 다른 자긍심을 준다.

태권도와 가라테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왜 일본의 수많은 연예인들이 오끼나와 출신인지도 한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삼별초의 자긍심과 자존심, 조국에 대한 사랑이 한번의 지르기와 발차기에
담겨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삼국시대를 거쳐온 우리의 진정한 전통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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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내용입니다.

설령 그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라 한다 해도 오끼나와의 무술, 즉 가라테와

현재의 태권도와의 관계성을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또한 삼별초와의 관계성을 밝히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맞습니다. 특히 직접적인 관련성은 현재 문헌이 발견되지 않는 한 그저 가정일

뿐입니다.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는 무인들이 중심이 되는 나라였습니다. 기간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태조 이성계 또한 무인 출인이며 적어도 조선 초까지는 무인들이 어깨에

힘주는 시기였죠. 이때는 검술, 창술, 궁술, 말타기등을 비롯해 맨손으로 하는 무술 또한

1:1 강습을 통해 전해졌을 것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양난을 겪고 나서 무술을 하는 사람은 일부 관직에 나가고

일부는 상단의 호위무사 정도로 사회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적었습니다.

태껸의 경우 여러가지 성격이 있지만 무엇보다 유희적 측면이 강하다 할 수 있어

무예 혹은 무술로 분류하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유희적 측면이 현재와 미래에

태껸이 각광받을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엄숙함과 숙연함은 그저 전장에서 필요한

것일 것이며 평상시에는 마치 비보이 배틀과 비슷한 양상의 놀이가 더 필요한 것이겠죠.

물론 실전에서의 유용함은 기본이구요.


아무튼 다시 삼별초 이야기를 하면 삼별초는 마지막에는 몽골과 고려 연합군을 대상으로

전쟁을 했습니다. 일단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에선 제주도에서 전멸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 ~!! 그런데 그 삼별초가 오끼나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오끼나와는 그들의 안식처였을까요? 바로 그 순간부터 평화는 시작되었을까요?

30년이 넘는 대몽 항쟁의 피로를 푸는 장소였을까요??


1271년 고려 몽골 연합군은 대마도를 정복하며 일본을 침략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폭풍우가 불어 연합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습니다.

다시 10년 후 1281년 2차 침입을 하지만 마찬가지로 폭풍우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돌아가게 됩니다.


삼별초가 제주에서 멸망한 것으로 알려진 시기는 1273년입니다. 군대가

보강되었을 가능성은 아주 높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삼별초와 전쟁하던 군대가

일본으로, 당시 명칭으로는 왜로 갔던 것입니다.


오끼나와의 삼별초는 어떻게 했을까요?

오끼나와에 삼별초 잔류군대가 있었다는 것을 여몽 연합군은 몰랐을까요?

만약에 여몽 연합군이 몰랐다 해도 오끼나와의 삼별초는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현재 왜와 전쟁은 위험요소이다.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다음은 바로 우리일 것이다.

그리고 철전지 원수들과 일전을 불사하길 원하는 전사들이 이를 갈고 있었을 것입니다.

원으로 가서 황제의 목을 따고 싶었겠지만 그럴 여력을 없고 일단 침략해올 적을

물리치고 더 힘을 키워 다시 고려로 돌아가는 것이 꿈이었을 것입니다.

아직도 오끼나와에 남아있는 고려성의 유적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오끼나와의 삼별초군은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오끼나와의 원주민들도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려군의 무술이 오끼나와에 당연히, 필연적으로 교육되게 됩니다.

그중의 하나가 당연히 가라테이며 이것은 당나라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이게 구라일 것입니다. 삼별초가 도착했을때 그들은 거의 신석기 시대 정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술이라뇨 ..??

무술이란 인체에 대한 상당히 체계적이며 고급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며

그 자체로 철학만큼이나 논리적인 것입니다. 당연히 신석기 시대 정도의 문화라면

고급 무술을 보유할 수 없습니다. 몽둥이나 돌로 찍는 정도면 또 혹시 모르겠습니다만.

오끼나와의 삼별초는 한동한 전시와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백전 노장들은 세월 앞에 소리없이 사라져가고

그들의 원한은 오끼나와 앞바다에 남았겠죠.

그리고 류큐왕국이 들어서고 오끼나와에서 삼별초의 전설을 그렇게 묻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적들이 남았고 그 유적들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태권도가 고대로 부터 이어진 우리 고유의 무술이라는 말이 사실 근간에는 그저

구라, 듣기 좋고 보기좋게 박정희 시대에 포장한 포장지이며 실재는 가라테의 아류이다는

자기모멸적인 이야기들이 진실인 양 퍼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의 가라테와 태권도는 비슷한 원류에서 시작하여 달리 발전한

것입니다. 아들이 아니라 동생정도가 되겠죠.

하지만 진정한 진실은 위에서 누누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긴 여행을 떠나고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이제는 태권도와 창과 검 그리고 더 나아가 말타기 등과의 교류를 생각해볼만한 때입니다.

어쩌면 태권도의 연구를 통해 삼별초의 무예를 되살릴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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