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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제로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무지한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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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이다.

유교적으로 생각하면 부활절은 예수의 제삿날이다. 물론 부활과 망자의 기일은
사전적으로 다른 의미이다.

하지만 십자가와 부활은 신앙적인 개념이다. 신앙적인 개념이라는 것은 개개인의
믿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을 공공연하게 보편적/과학적 진리인 양 주장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개인의 신앙의 문제는 개인의 신앙에 머물러야 한다.
개인의 신념과 믿음과 객관적, 과학적 사실과는 당연히 구분해야 한다.
다시말해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뭐 자신의 견해와 다르다는 것만으로 비판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전체주의적 폭력이며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간에게 가장 악질적인 것이다.

이것은 어느 한쪽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 자신의 종교적 견해때문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것은
당연히 인정해야 해야 한다.
제사만이 아니다. 자신의 종교적 견해때문에 어떤 음식을 먹지 않는다던가
어떤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 또한 당연히 인정해주어야 한다.
게다가 종교적 견해를 넘어선 율법적인 명령, 법률적인 명령에 해당한다면
분명히 용납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말라'라는 계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태어 찾아본다고 하면 십계명에 나오는 첫번째 두 계명

1. 야훼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2. 우상을 섬기지 말라 (혹은 절하지 말라)

이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과 절하지 말라라는 것은 어떤 문화권에서는
같은 의미이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우상을 둘째치고 절하지 말라라는 것은
정말 웃기는 이야기이다. 절이라는 행위는 유라시아 모두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행위이다. 동북아에서 영국까지 우리나라의 '절'과 유사한 행위를
볼 수 있으나 그 목적은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상대에 대한 존중을 표현한
인사의 방법이다. 설날에 새배하는 것도 우상숭배일 것인가 ..??
그렇다면 수많은 장로들과 집사들은 설날마다 우상이 된 것일까??
물론 새뱃돈만큼의 우상이겠지만 ...


우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상의 의미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1. 우상의 정의

- ‘우상’의 사전적 정의

① 나무·돌·쇠붙이·흙 따위로 만든 형상.

② 숭배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나 사람.

여기에 성경적인 해석을 조금 덧붙인다면

하나님만을 경배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 만든
유·무형의 형상.


이 정도가 될 것이다.

제삿상이 무언가를 재현하는 형상은 당연히 아니고 숭배라는 개념이 애매하긴 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신神적인 숭배의 대상은 아니다. 더 쉽게 기독교인이 자기 아버지
자기 할아버지 제사를 드린다고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변질된다고 한다면
그건 그가 개독이며 날나리 교인이라는 증명하는 것이지 제사 자체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사실 아주 예전 삼국시대가 성립하기 이전 소국가, 부족국가 시절에
행해지던 무천, 동맹, 영고와 같은 재천행사에 절하지 못한다고 하면 100%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보면 정말 우상숭배에 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조상도 아니고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 제사가 우상숭배,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라고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전혀 이해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절하지 말라'라는 이 문장의 해석과 마찬가지로
절이라는 행위가 각 문화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살피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사라는 의식의 의미를 살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제사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 대상은 무엇인가 종교적 행위인가
등등을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관과 대립된다 안된다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제사를 거부하는 대부분의 개독들은 .... 그저 개독스러울 뿐이다.
가장 심한 경우는 목사의 명령이다. 목사가 하지 말라고 했다.
혹은 주일학교때부터 세뇌되어 무비판적으로 그저 따라야 하는 명령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개독들은 제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 개독이란 단어는 개신 기독교가 아니라 개신교 파쇼, 전체주의자
대화불가능자, 이성 및 비판정신 결여자의 의미이다. 
이런 자들에게는 그저 목사가 신일 뿐이다.
그 목사가 간통을 하던 정치에 개입해서 뻘짓을 하던 그저 하나님의 대리자로
보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인간인 것이다.

물론,
겉 옷을 팔아 칼을 사라 라던가 화평을 주러 온게 아니고 분란을 주러 왔다 라던가
가족이 서로 원수가 된다 라던가 죽은 아비 장례도 못 치루게 한다던가 등의
성경구절들이 마치 제사문제로 갈등을 겪는 개독 자신의 이야기 인 듯 보이고
그래서 성경구절이 이렇게 내 자신에게 육화되는구나, 성령이 임하시는 구나
내가 이겨내야 하겠구나 등의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겉옷을 팔아 산 칼이 향하는 곳은 밖이 아니라
안이다.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매번 그렇게 자신을 죽여나가야 하는 것이며
매번 부활을 이루어내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죽여가는 과정은 절대 평안할 수 없다. 고통과 분란의
연속일 것이다.  물론 그리고 나서 오는 평안이 진정한 평안이라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가족이 서로 대립하고 원수가 될 것이란 말은 극단적 형식주의에 빠진 당시
유대를 기준으로 껍질만 남은 형식과 그 내용의 사랑이라는 모든 율법의 근간이 되는
사랑이 대립할 것이라는 메세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원수가 되서 서로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성경의 메세지이니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고민할 필요를 별로 없을 것이다.
(성경에 불합리해보이는 모든 구절을 내가 다 해설할 필요는 없어보여
다른 구절들은 언급하지 않겠으나 기독교의 '사랑'의 개념이 기본이 되여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원수에서 원수로 평생가는 개독과 칼날이 남을 향해있는 개독,
화평, 평안이란 단어는 예배당에서만 존재하며 평상시 삶에서
분란을 만들고, 갈등을 만들고 목사만을 숭배하고
성경의 내용에 고민하고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육되는
개독들은 정말 답이 없다. 쉽게 견독犬毒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까 ?? 세상에 유해한 개같은 독.
(좀비라는 표현도 있다.)


제사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선 유교적 인간관부터 알 필요가 있다.
유교적 관점으로 보면 인간은 천기와 지기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천기가 바로 혼魂이고 지기가 바로 백魄이다.
백은 각 이론에 따라 3일부터 49일까지(약간 불교적 영향이 있는 것 같다)
기간은 다르지만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소멸하며
혼은 약 120년, 4대정도 간다고 한다.
물론 증명 불가능한 것으로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혼은 4대 정도 가고 나서 소멸하는 것이다.
이 4대가 지나가는 동안 신주 혹은 위패를 사당에 모시게 된다.
이 기간동안 약간 애매한 상태, 완전히 죽은 것도 아니도 산 것도 아닌
상태로 가족의 일원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4대가 지나가면 위패는 태우고 신주도 묻어 완전히 소멸,
유교적 관점으로 완전히 죽은 것이 되는 것이다.
4대까지의 혼이 바로 제사의 대상이다.
사당은 그저 제사만 지내는 곳이 아니라 실재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가족의 대소사에도 항상 먼저 인사를 오는 곳이었고
이 실재로 역할을 하는, 가족의 구성원으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카톨릭은 처음부터 제사의 의미와 대상에 대하 인지하고 있었다.
예수회에서는 제사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종교와 별 관련이 없다고 보았고
다른 종파에서는 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1939년 로마 교황청은 조상에 대한 제사가 종교와 상관없는 것이라
공인했다. 1628년부터 1939년까지 거의 3백여년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여기에는 제사만이 아니라 절과 같은 행위, 상이한 문화권의 동일한 행위에 대한
그 문화권만의 의미를, 다양성을 인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결과론 적으로는 그렇지만 여기에도 여러 의견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이런 고민과 논쟁이 요즘 들어 간간히 보이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보수적인 목사들은 제사에 대해 부정적 아니 더 정확히는 금기시하고 있고
일부 추모예배로 대신하기는 하지만 선교사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목사들이 다시 신자들에게 주장하여 현재의 상황이 된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이 과정에 우리의 전통과 신앙의 문제, 제사의 진정한 의미, 문화권의 차이 등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뇌가 없었던 것이다.
제사 자체를 마치 서낭당에 자신의 소망을 비는 것과 마찬가지의 미신으로 치부한다던가
아니면 그 대상을 막연하게 조상이라며 반대하는 것이 개신교의 모습이라면
우리 것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 미아와 다름없는 것이다.

물론 제사의 의미를 모르고 마치 미신처럼 여기며 형식주의에 빠진 것은
당연히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며
현재의 상황, 자기 부모님 제사도 지내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하면
4대조 고조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DNA가 증명하듯 현재의 자신에겐 조상들의 유산이 존재한다.
(조선 중기만 해도 제사는 친가 외가를 가리지 않았다. 딸과 아들의 차별이 없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DNA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합작품? 인 것이다. ^^)
조금 더 의미를 확장하면 우리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역사에 부끄럽지 않기위해 자신의 도덕성을 회복하고
현재의 자신이 그저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것에 감사하는 정성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 것이다. 그 다음에 형식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부모가 혹은 더 위의 조상이 역사의 부끄러운 행위를 했다면
자신은 그러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도덕성의 회복의 가능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다 필요없고
그저 자신의 비이성적인 자신의 종교적 견해로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사람들은 제목과 마찬가지로
100% 개독이며 견독이고
형식주의에 빠진 바리새인들보다 더 악독한
독사의 자식들인 것이다.




* 유교에서 모든 사람의 혼이 4대만을 유지한다고 여긴 것은 아닌 것 같다.
위인이라 할 수 있는 본받을 만한 혹은 기억해야만 하는 조상들은 4대를 넘어
제사 지내는 경우도 있다.

** 도덕성의 회복이란 측면에서 제사라는 것이 종교적 행위로 해석될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무엇이 종교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데
신 혹은 신적인 존재 없이 도덕성이란 측면에서 왜 바르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 당위에 대한 이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무신론도 종교의 형태이고
무신론에는 불교만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제사는 종교적 행위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 개독스럽다. 요즘 자주 쓰는 형용사적 표현으로 당연히 사전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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