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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에서 핀 꽃 라틴재즈 5. 라틴재즈가 성립하기까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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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 이어서...

 

      하지만 이런 성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929년 미국의 증권가는 침체기에 빠졌으며 결국 대공황을 맞게 된다. 흥청거리던 미국은 급속도로 침체되어 갔으며 이와 함께 수많은 재즈 연주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 30년대 경제 공황 속에서 재즈는 기존의 블루스적인 요소보다는 브로드웨이적인 요소와 결합하게 되는데 이것은 대중성이 강한 음악 다시 말해 팝적인 요소가 점점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팝과의 결합은 재즈가 좀 더 단조롭고 쉬우며 대중들이 자주 접하던 음악으로 다가갔다는 것이다. 모두 경제 공황의 결과이다. 사람들이 흔히 듣던 음악에 도발적인 솔로 연주자들의 변주를 즐기고 가벼운 변주가 주는 유머를 즐기며 어려운 시기를 버텼던 것이다. 사실 어렵고 힘든 시절에는 가장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것들이 직접적인 위로가 되기 마련이다. 미국의 대중들은 그 당시 그런 위로를 원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던 연주자들은 한시적으로 다른 일을 하거나 유럽으로 떠나기도 했다.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하여 듀크 엘링턴, 잭 힐턴, 코먼 홉킨스도 유럽 공연을 떠났으며 유럽은 당시 최고의 기량을 선보인 재즈 연주자들을 직접 보면서 새로운 문화적 충격을 받았으며 이것은 이후 유럽식의 재즈의 시초가 되는 사건이 된다.


술과 음악 그리고 여자 혹은 사랑, 인간이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게 만드는 원동력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금주령은 현재의 미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억압적 상황일 것이다.


언터쳐블을 비롯하여 수많은 마피아 영화들이 이 금주령 시대를 배경으로 많들어졌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이 시대가 범죄의 시대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1935년과 40년 사이, 루즈벨트 대통령이 들어서고 금주령이 해제되고 그리고 스윙의 시대로 기억되는 바로 그 시기에 재즈는 미국의 대표적인 대중문화이자 국민적 오락으로 자리 잡게 된다. 거리에서 그리고 클럽에서 남녀가 커플로 스윙댄스를 추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으며 또한 당연히 스윙 음악을 연주할 밴드가 필요하게 되었다. 지터 벅이나 린디 합과 같은 스윙댄스 음악이 대유행을 하게 되며 이것은 유럽과 다른 문화권에 새로움, 자유의 상징처럼 이해되기도 했다. 

      또한 대공황 시기에 팝과 결합한 듣기 편한 재즈곡들도 여전히 발전하고 있었는데 팝과의 결합으로 연주곡이 아닌 노래가 들어간 재즈곡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전형적인 팝 스타일의 노래가 아닌 마치 재즈 연주자의 독주와 같은 개성 있는 노래를 선보인 레스터 영, 빌리 홀리데이 같은 보컬리스트들도 나타났다. 다시 말해 스윙의 시대는 비단 스윙만이 아니라 재즈가 미국에서 만개한 시기였고 미국의 대중문화와 재즈는 거의 같은 단어였다고 할 정도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물론 너무 대중적인 스윙의 분위기에 반기를 든 재즈 연주자들이 없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스윙의 힘은 쉽게 꺾일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성기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했고 미국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된다. 또한 수많은 재즈 연주자들도 군인으로 참전하게 된다. 재즈는 대공황 때와 비슷하게 전쟁의 고통과 공포를 달래주는 역할을 하게 되며 음악이 있을 수 있는 자리도 굉장히 제한적이 된다. 어떤 면으로 두 단계의 하락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두번의 하락의 결국 예술적 재즈가 태어나게 한 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두번의 하락을 겪고 난 후 재즈는 요즘 쓰는 말 그대로 군대위문공연의 수준으로 경우 명맥만 유지된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드디어 비밥의 시대가 오게 된다. 어떤 전문가들은 혁명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 혁명에 다시 라틴재즈를 만나게 된다. 그 동안 참아왔던 예술적 재즈가 폭발한 것이다.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지 전까지 무역라인.교역만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문화적 소통도 있있다. 다시 말해 한시적으로 하나의 문화권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무역라인은 신대륙에서 은을 가져가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실 라틴재즈라는 명칭은 40-50년대에 들어서야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재즈가 라틴문화권을 배경으로 출발한 음악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20세기 미국의 역동적인 경제적 발전과 함께 재즈는 미국의 음악으로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음악적 실험, 이전의 그 어떤 음악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거쳐 다양한 기법들이 발전한 반면에 라틴문화권, 특히 카리브 해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권은 사회적 변화와 유동성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음악적 변화 또한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멕시코 만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정치적 주도권은 미국에게 있었으며 특히 쿠바의 경우 미국의 휴양지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계속적인 교류가 있어 그 영향을 받아왔고 다른 카리브 해의 도서지역의 경우 이주를 통해 뉴욕 등의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졌다. 이런 역사적 상황이 비밥의 성립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재즈의 기준으로 보면 비밥의 시대라 할 수 있지만 스윙의 후계자가 있었다. 바로 맘보mambo이다. 맘보는 초기에는 전쟁 후 황폐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안정제와 같았다. 맘보의 유행은 미국과 전 세계에 라틴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어느 곳에서는 잠깐 붐을 일으키고 어느 곳에서는 크게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 맘보에 대한 부분은 뒤에 따로 자세히 설명할 예정이다.

 

      아무튼 예술적인 비밥과 맘보가 공존하는 시대가 열렸다. 다만 한 가지 언급할 것은, 이런 구분이 당시에는 희미했다는 것이다. 이런 구분은 오히려 후대에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당시에는 조금 더 심각하고 조금 더 즐겁고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장르에 뮤지션들은 겹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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