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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에서 핀 꽃 라틴재즈 2. 포크(folk), 양키 그리고 크레욜 혹은 끄리오요 #3 : 재즈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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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흑인 그리고 인종차별.

 

 

 

 

     인종차별은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존재해왔으며 근대에 이르러서야 없어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로마에는 유색인종 황제가 있었으며 이슬람 안에서는 흑인과 아랍인의 차별이 특별히 존재하지 않으며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비슷하게 사회 계급에 따른 차별이 있는 곳도 있으나 그것을 인종적 차별1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래도 찾아본다면 역사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여러 지역에서 박해를 받아온 유태인 정도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사실 아랍인과 유태인은 한 아버지의 자손으로 인종적으로 유럽인과 아랍인 그리고 유태인을 구별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유태 전통 의상이나 아랍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 경우라면 아주 쉽겠지만 말이다. 이것은 결국 인종적인 차이가 아니라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구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실크로드와 바닷길 등을 따라 교역을 하던 사람들은 개방적인 사람들이며 새로운 인종을 차별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장사의 고객으로 보는 사람들이기에 인종차별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유태인이 차별을 받은 이유는 무엇보다 유태인 스스로에게서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특유의 폐쇄성과 고집 그리고 선민사상이 결과적으로 차별을 낳았다고 할 것이다. 오히려 서양에서는 인종보다 종교라는 것이 차별 혹은 구별의 척도로 더 오랜 기간 사용되었다. 동양에서는 각 국가 사이의 구별과 차별이 현재도 존재하긴 하지만 그것이 인종적인 차이에서 기인되었다기보다는 역사 및 문화적인 배경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각 국가들의 자기동일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것의 결과로 유럽이나 아메리카의 많은 국가들에서와는 달리 유난히 애국심이나 민족주의가 강한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흑인이어서, 보기에 흑인 같아서,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차별을 했던 것은 미국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도를 꼽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대단히 드문 경우이다. 미국의 경우는 앞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미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부와 루이지애나 등의 지역은 라틴문화권으로 인종에 상관없이 서로 잘 어울려 살았으며 문화의 교류도 자연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인종적 차별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그리고 법률적으로 차별을 금지하지도 않았고 권장하지도 않았다. 물론 노예의 삶이라는 것은 시민의 기본권을 인정받는 것은 고사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1865-1870년 미국 헌법 제13조와 제14조 및 제15조 수정조항에서 처음으로 기본적인 시민권을 약속받았다. 1875년의 시민권 조례는 공공시설을 백인만이 아니라 흑인에게도 동등하게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했으나, 1883년 연방 대법원은 이 법률을 사실상 무효로 만들었다. 1900년에 이르자 북부와 서부에서는 이미 18개 주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공공정책을 법률로 제정했지만, 남부에서는 시민권을 침해하는 새로운 법률(祖父 조항, 1867년 이전에 선거권을 가졌던 부친이나 조부의 자손 이외에 교육받지 않은 흑인에게는 선거권을 주지 않는다는 조항)을 제정하는 한편, 인종차별 관행을 더욱 강화했다. 그리고 미국 대법원은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1896)2에서 흑인과 백인에게 질적으로 흡사하지만 따로 떨어져 있는 공공시설을 제공하는 것을 지지함으로써, 흑인과 백인을 격리/차별하는 인종차별정책을 합법화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종차별을 합법화했다는 것이다. , 법이란 사회적 규범의 최소화라는 것을 상기해보면 당시 미국의 인종차별이 얼마나 심했을 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프랑스계 유색인, 혼혈인 등이 모두 유색인종들이 차별 대상3이 되면서 앞에서 언급했던 라틴계의 문화적 산물들이 점점 희석되거나 사라지기 시작했다. 프랑스계, 스페인계 그리고 아프리카계 이름들은 영미식으로 바뀌게 되었고 라틴계통의 악기들 특히 아프리카 풍의 타악기들은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법적으로 인정한 흑인에 대한 차별이 사회적으로는 흑인만이 아니라 라틴계 혹은 유색인종이나 유색인종으로 보이는 이들에게까지 확대되면서 사회 문화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사실 인종차별이 합법적으로 공인되기 전까지 멕시코 만 주변의 지역은 프랑스계, 스페인계, 쿠바계, 멕시코계, 기타 유럽계 및 아프리카계의 사람들이 느슨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었고 마을 축제의 경우에는 모두 서로 어울려 노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유럽의 포크음악이 아프리카의 타악기와 함께 협연을 하거나 기타 반주에 맞추어 전통 아프리카 방식의 노래를 부르는 것도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인종차별의 합법적 공인 이후에 이 느슨한 공동체들은 흑인과 백인이라는 두 가지 갈림길을 걸어야만 했고 흑인이라는 길을 걷게 된 공동체들은 외부적으로는 사회적 멸시와 차별을 겪어야 했으며 이의 반대급부로 내부적으로는 자기 동일성을 강화하는 방식, 예전 라틴계의 느슨한 공동체가 아닌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운 폐쇄적인 공동체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후에 미국의 대중문화가 발전하는 데에 엄청난 자양분이 되지만 미국문화를 단순한 흑인문화와 백인문화의 대립과 조화로 파악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라틴이라는 자양분에서 성장하던 아메리카의 포크음악은 현재 우리가 재즈라고 부르는 음악으로 변해가는 첫 단추를 끼우게 된다. 유색인종의 느낌이 나는 모든 것을 버려야만 했으며 특히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다양한 타악기가 사라지게 된다. 타악기가 사라진다고 리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비단 타악기만이 리듬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악기만이 리듬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는 방식, 걷는 방식 그리고 생활하는 방식도 리듬으로 표현될 수 있다. 한참 전에 뿌린 향수처럼 강렬한 향은 사라졌지만 체온이 올라갈 때 갑자기 퍼져오는 은은하면서도 짙은 향처럼 아프로 라틴의 향기는 퍼져오기 시작했다. 너무나 유럽적인 악기인 피아노 연주안의 멜로디 아니면 코드 진행 속에서 숨어 곡의 클라이맥스에 퍼지는 당김 음들의 흥겨움, 그 강렬함. 이것이 우리가 현재 재즈의 원형이라 부르는 래그타임(ragtime)4이다. 이것은 아프로 라틴과 앵글로 색슨적 유럽문화의 첫 번째 불륜, 밝힐 수 없었던 내연의 관계였다. 그리고 그 관계의 결과, 입양된 아이, 혼혈이나 혼혈이 아닌 척 해야 했던 아이, 동시에 완전히 그 가문의 적자嫡子인 척 해야했던 아이가 태어나게 된다.

 

     우리가 재즈라 부르는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19세기가 저물고 20세기가 열릴,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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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라의 골품제와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외부 세력이 유입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정착 민족과는 다른 민족이 발전된 기술로 토착인들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구별된 신분제가 생기고 이후 사회 발전 단계에 따라 세분화된다는 것이다. 카스트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민족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 구별된 사회시절이 양쪽 모두 평등하게 존재한다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 법률은 1954년이 되서야 파기되었다.

 

3. 헐리웃 고전 영화 슬픔은 그대 가슴에 (Imitation of Life,1954)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흑인과 백인의 아이는 유색인종으로 간주되어 차별의 대상이 되었다. 마치 진골과 성골이 결혼하면 아이는 진골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영화에서는 흑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딸이 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 흑인 어머니는 그녀의 종으로 살아왔다. 출생의 비밀을 비롯하여 당시 미국의 사회상이 잘 나타나 있다.


 

4. 래그타임의 유래에 대해서는 재즈라는 명칭의 유래와 비슷하게 많은 설이 있으나 당김음이 많이 들어간 흥겨운 음악 혹은 흥겨운 무곡舞曲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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