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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각의 제국2, 사다의 사랑,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적 사랑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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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각의 제국2, 사다의 사랑 혹은 Johnen 定の愛, 정의, 정의(正義)가 아니라

정의(定意), 의미를 분명히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감각의 제국2는 사랑의 의미

말한다는 것인데 약간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이 아닌

사다라는 여자의 사랑을 정의한다는 것이기에 약간 위험하다고나 할까? ^^


극단적인 경우는 보편적인 예가 될 수 없다. 하지만 극단적인 경우가 되어야

보이는 것이 있기는 하다.



감각의 제국 2 : 사다의 사랑
  • 1936년 5월 세계 제 2차대전이 세상을 파괴할 때, 동경의 한 요정에서 성기가 절단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피해자는 요시다야 요정의.. 더보기


또한 이 감각의 제국은 실화이기도 하고 어떤 연관성을 확실히 갖고 있는데

쉽게 일본 버전의 사랑 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정의는

일본식 사랑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실제 이야기는 당연히 감각의 제국의 모티브이면서 이 감각의 제국은

실낙원, 사랑의 유형지 그리고 사다의 사랑까지 다양한 상호연관관계,

소위 말하는 상호 텍스트성을 갖는다.

실낙원은 현재의 사랑의 찰나의 것이 아니라 영속한 것,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서로 청산가리를 먹고 섹스를 하다 죽는다.

사랑의 유형지에서는 불륜의 사랑이 너무나 강렬하여

사랑과 가정 사이에서 방황하던 여인은 상대방의 손에 죽기로 작정하고

자신의 목을 졸라달라고 한다. 질식감의 쾌감과 현실과 어찌할 수 없는

열정의 강렬함 속에서 점점 더 극단적이 되고 결국 사랑하는 남성의 손에

목이 졸리며 그 독한 오르가즘 속에서 서서히 죽어간다.
가장 아름다울 때 떨어진다, 혹은 그때 떨어지기에 가장 아름답다는

사쿠라, 벚꽃을 상징한다. 이게 어쩌면 일본의 사랑이다.


감각의 제국
  • 1936년, 도쿄의 요정 주인 이시다 기치조(타츠야 후지)가 성기가 잘린 채 변사체로 발견된다. 수사를 벌인 경찰은 요정의 종업원인 아베 .. 더보기



실락원
  •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어도 좋습니다.
    함께하는 바로 이 순간이 낙원입니다.

    완벽주의 의사 남편과의 사랑 .. 더보기


여기에 딱 반대로 무궁화 사랑, 벽에 똥칠할 때까지 함께 살자,

우리는 백년 아니 이백년 해로하자는 것이 우리나라의 사랑일까?


결혼해서 함께 살면서 그녀가 더 예쁘고 사랑스러워요.

결혼해서 함께 살면서 실망만 하고 콩깍지도 벗겨지고 사실 좀 불행해요.

아마 둘 다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방향이 더 좋은 것인지 혹은 더 옳은 것인지

바른 부부관계가 무어냐고 물어본다면 그 답도 확실할 것이다.


아무튼 이 영화를 푸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개인적인 관점인데,

개인적 욕망으로 사랑을 풀어내는 것이다. 사실 바타이유의 에로티시즘,

옥타비오 파스의 이중 불꽃 등에 자세히 나와 있는 내용으로

90년대부터 우리나라와 전 세계에 유행한 욕망이론의 한 부류이다.
그 끝은 사실 죽음이다. 에로티시즘의 끝은 죽음이다. 

 

사랑의 유형지
  • 내 인생에서 오늘이 최고로 행복한 날이에요.

    어느 여름날, 불꽃놀이 축제가 열리던 그날 밤,
    서로의 사랑.. 더보기


여기에 새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몇 마디 하자면

이 욕망이론의 기본은 바로 소유욕이다. 너를 갖고 싶다는 욕망의 기본은

김장훈의 노래처럼 그대여 나와 같다면… 이 된다.


나와 같은 생각 나와 같은 마음, 그런데 기본적으로 나는 너와 다르다.

나는 네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

사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나는 네가 될 수 없는데 네가 되었다고

널 가졌다고 믿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 막연하고 허황된 믿음으로 권태가 시작된다.

또한 욕망에 중독이 되면 결국 상대방에게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살해, 신체 절단 등…, 상대방을 소유하기 위해 주체로서 인간이 아닌

대상으로 인간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 주제로 바로

넘어오게 되는데

바로 이 사랑이 제국주의적 사랑이고 이것을 매개로 제국주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오기 때문이다.


영화 감각의 제국에서 하나의 장면이 있는데 일본 제국군이 행진하고

남자 주인공을 스쳐갈 때 남자 주인공은 고개를 돌리고 외면한다.

여기서 제국주의와 개인의 문제를 언급하는 비평이 있었다.

이 영화에 대해 토론할 때 제국주의 혹은 역사와 이 주인공들을 연관하는 것은

의미가 있으나 불필요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욕망이론만으로도

이 영화를 충분히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생각을 곰곰이 해보면 제국주의나 제국주의적 사랑, 소유욕이나

거기서 거기다. 아니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대상에 대한 소유욕은 다른 나라, 다른 민족으로 치환하면 이 둘은 묘하게

닮아있다. 사실 모든 상황이 극단적으로 될 때 나타나는 것이 어쩌면

본질적인 것, 혹은 그 기저에 흐르던 본심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하고 누가 물에 빠지면…, 뭐 이런 질문을 여성들이 종종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사다의 사랑에서 개인의 사랑과 국가 및 제국이 겹친다.

하지만 개인의 사랑, 개인의 행복 추구가 국가와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

물론 그럴 가능성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럴 수 있다는 가정 그리고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파쇼적인 것이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상대방에 대한 호감, 사랑, 혹은 욕망으로

만지고 싶고 빨고 싶고 핥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섹스하고 싶고

뭐 그런 것인데

이 단계를 에로티시즘의 단계라고 할 수 있는데

다양성이 그 끝이 보일 때

한쪽이 스스르 작아지고 빠져나가는 것 같을 때

한쪽의 소유욕은 더 불타게 된다.

그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그리고 나는 널 모두 받으리 …

이런 합의를 하게 되면 정말 엽기적인 사건이 생기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경우이다.

어떤 이들은 생존에 바뻐,

어떤 이들은 태생적으로 무덤덤하여

이런 단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바로 제국주의이고 파시즘이다.

너를, 너희들을 소유하겠다는, 그래야 한다는, 그게 바로 정의(正義)라는

그 망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폭력들이 제국주의에 들어있다.

감독은 일본의 제국주의, 전체주의 그리고 파시즘의 크로스 카운터로

사다의 사랑을 말했던 것 같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둘이 같다는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극단적 전체주의와 극단적 개인주의는 서로 통한다.

극단에서 말이다.

영화 말미에 희미하게 나오는데

결국 사다가 원했던 것도 행복한 보통 가정이 아니었을까?

또 그 길고 긴 욕망의 끝, 섹스에 끝에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그의 아이가 아니었을까?

그는 그럴 수 없다고 했고 그렇게 그녀의 욕망은 폭주하기 시작했다.

성기 절단은 바로 그런 욕망의 표출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에 아이를 안은 듯 걷는 사다의 모습에서 그녀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평범한 사랑일 가능성도 엿보였다.

아무튼 1936년 일어났던 실화가 70년대 냉전의 시대에 만들어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제 2000년대 버전 정확히 2008년 버전이다.

제국주의와 냉전 그리고 현재의 시대적 차이가 있기는 하고 해석의 차이도

있지만 일본이라는 테두리에 모두가 합쳐진다.

아마 일본 사람들은 잘 모를 수도 있다.

허나 자신의 배를 가르는 애국심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성기를 자르는 것쯤이야,

사족. 교장으로 나오는 영감님은 감각의 제국에서 사다를 사는, 그러니까

매매춘을 한 인물이다. 전형적으로 색에 빠진 인물이었는데

사다의 사랑에서는 그 성향이 많이 변했다.

모델이자 병원의 간호사로 나왔던 여성은 감각의 제국에서는 나오지 않은

인물로 개인적으로 이사다 키치조라는 인물이 소위였는지 아니 군인이었는지

그러다 부상으로 전역한 것이지, 군병원에서 또 간호사를 건드린 것인지

잘 모르겠다. 뭐 특별히 알아보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서

감각의 제국이란 영화 혹은 모티브는 제국주의적 사랑임에는 변함이 없다.

비터문, 베티블루 37.2, 나인하프 위크 등 개인의 극단적인 욕망을 다룬 영화는 많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실낙원, 감각의 제국, 사랑의 유형지 등 비슷한 모티브의

일본 영화와 소설도 적지 않지만 개인과 국가 혹은 제국과의 관계, 둘 사이가

비슷하게 겹친다는 것,

결과적으로 미친 광기의 사랑과 미친 제국주의는 같은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수작은 오히려 감각의 제국2, 사다의 사랑일 것이다.

다만 감독도 두 가지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란 것을

알았을까?

사족2 스기모토 아야, 그녀의 몸은 참 예쁘다. 밧줄에 묶였을 때도 그냥 누드로도

예뻤지만 특히 약간 헐벗은 채로 탱고를 출 때 참으로 예뻤다.

개인적으로 여자는 목마른 욕망의 화신, 남자는 감각적이고 이성적인

조절자, 목마르고 배고프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게, 과식을 했지만

배가 터질 정도는 아닌, 그래서 다음을 기대하게 하는,

하루 세 끼가 아니라 주말의 외식 같은, 의외성, 하지만 감정은 한결같음,

동시에 열정의 폭발을 아는 사람이 최고가 아닌가 싶다.






..... 응?? 개인적인 성향을 취향을 말한 것은 아니다.


비터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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