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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칸 바로크, 건조한 지옥, 천국의 전쟁Batalla en el Cie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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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전쟁
  • 감독 : 카를로스 레이가다스
  • 충격과 파격을 넘어선 논란이 시작된다!
    멕시코 군대 장군의 자동차 운전사로 근무 중인 ‘마르코스’는 그의 부인과 함께.. 더보기

영화 포스터, 머리카락을 일부러 만들어 가슴을 가렸다. 



멕시코 시티 중앙광장, 거대한 국기가 게양되며 영화는 시작한다.

질서정연한 헌병대의 사열 맨 뒤 이물질 같은 이가 있다. 바로 영화의 주인공 마르코스이다.

마르코스, 보통 장군이라 번역되지만 주인님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빠뜨론Patron

집사 겸 운전수, 그의 아내는 지하철역에서 자명종 시계와 기타 식품 류를 판다.

전형적인 멕시코의 소시민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였을까? 부자가 되고 싶던 것일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부잣집 아이가 아닌 그냥 동네의 아이를 유괴했던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아이를 유괴했고 그 아이가 죽어버렸다.

 

불안不安, 이 영화는 잃어버린 안경이 상징하는 희뿌연 광경,

그 막연한 불안감으로 시작한다.


안개, 그의 불안감을 상징한다. 

 

그리고 역설, 너무나 불안한데 티를 내지 못하는 일상

그 사이에서 주인공은 고통 받는다.

 

영화의 비주얼 아나, 아나는 고급창녀이다.

일반 집을 개조하여 만든 업소에서 손님을 받고

그 비밀은 마르코스만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덕에 마르코스는 공짜로 몇 번 즐긴 적도 있는 듯 보인다.

아무튼 둘은 그런 비밀을 공유한 사이이다.


 넋이 나간 마르코스, 그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했어야 했을까? 



그래서였을까? 마르코스는 아나에게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한다.

마치 아나의 비밀처럼, 알아서는 안 되는 말해서는 안되었을.

 

마르코스와 아나의 섹스는 마치 교수형 당하는 죄수가 발기하는 것과 같다.

불안, 프로이드식으로 표현하면 타나토스의 정점에서

무언가 발산할 것이 필요했으나 그것은 순간적이다.

순간적 위안은 더 큰 불안으로 엄습한다.

 

영화의 성기노출을 비롯한 나체의 모습은 주인공의 몸매처럼 전혀 아름답지 않다.

추함, 인간의 추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약간의 인상을 쓰고 혐오스러움을 느껴야 정상일 것이다.

왜냐? 이것은 영화이니까. 보통 아름답게 육체를 묘사하니까.

하지만 뚱보들의 육체는 미와 추함을 논하기 전에

확실하게 영화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는 다분히 멕시칸 바로크적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나가 더 예뻐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구원의 천사가 아니라 그저 고급창녀일 뿐이다.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아나와 마르코스의 섹스는 그냥 그렇게 끝난 것 같다.

사정 없이 그저 억지 섞인 몸짓으로 애만 쓰다가.

하지만 마르코스는 짧은 찰나의 위안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그 찰나의 위안을 위해 아나를 찾았을 때

차갑고 건조한 그녀의 반응, 또한 일부러 설정한 듯 보이는

약간 마른 듯한 그녀의 애인, 그렇다 그녀의 다른 남자의 여자이며

모든 남자의 여자이다. 찰나의 위안이 헛것이라는 깨달음,

불안은 그의 영혼 안에 가득하다.

(그 불안을 가속시킨 것이 바로 스케이트이다.

스케이트장은 현재에도 멕시코 시티에 두 개 정도이다. 그것도 하나는 선수용이다.)

그리고는 무서워 오줌을 싼다.

그리고는 퍼뜩 깨달았을 것이다. 나의 비밀은 내 아내와 아나 만이 알고 있다.

그래서 아나를 죽인다. 그게 얼마나 충동적이고 우발적인지 아나의 애인이 멀쩡히

살아있는데 말이다.

 

아나와 아나와 밤을 보낸 아나의 애인 그리고 마르코스

불안의 마지막에 칼로 난자당한 아나, 그렇게 그의 불안은 바닥을 만난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그의 일상은 나락으로 추락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이 필요하다. 성모 과달루페가 현현했다는 과달루페 성당으로

무릎으로 기어서 간다. 과연 이것은 구원일까?

성당의 종소리는 들리지 않고

높게 올라갔던 멕시코 국기는 이제 내려온다.

 

사실 영화는 약간 단순한 구조를 갖고 있으나 내러티브가 약하고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 혹은 과장된 연기가 없이 아주 건조하여

감정이 소통한 구석이 거의 없다. 그래서 영화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뭔 말을 하는 것인지 잘 모르는 그런 상황으로 몰아간다.

또한 시각적 불편함, 비만한 몸이 화면을 채울 때

조명에 개기름이 빛날 때, 이럴 때는 상당히 불편하다.

어쩌면 기본적인 분장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마르코스의 부인, 늘어진 것은 턱살만이 아니다. 몸 전체가 그런 느낌이다.  


그런데 감독은 마지막까지 불경함을 보인다.

멕시코의 소시민은 언제라도 범죄자가 될 수 있는 도덕심을 갖고 있다.

국기 게양에 관련된 것으로 보아 빠뜨론, 마르코스가 섬기는 주인은 멕시코 정부의

핵심인사로 보인다. 그런데 그의 딸은 고급창녀이다.

과달루페 성당에는 십자가가 아니라 커다란 멕시코 국기가 걸려있다.

마르코스의 구원 혹은 천국이란

아나가 즐겁게 오랄 섹스해주며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 비만의 그의 아내가 아니라.

이 얼마나 비천하고 비루한 천국인가!!!

오히려 펄프픽션에서 존 트라볼타와 사물엘 잭슨이 말한 천국, 마리화나를 자유롭게 필 수 있는

네덜란드라는 천국이 조금 더 나은 듯 보일 정도이다.

 

디스토피아 혹은 멕시칸 바로크,

천국에서는 아니 하늘에서는 왜 전쟁이 일어났던 것일까?

지상이 지옥이 되었기 때문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2012년 대한민국이 과연 멕시코 보다??? 

 

어느 날, 대학교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키스방에서 일하다가 불법 마사지를 하며

매춘으로 돈을 버는 Q에게는 일 끝나고 집에 데려다 주는 P씨가 있다.

P씨는 Q가 세든 원룸건물 건너 건너 편 옥탑 방에 산다.

P씨는 한 달에 한번, 8월과 12월에는 두 번 Q의 고객이 되기도 한다.

Q는 겉으로는 열심히 공부하는 멋쟁이 여대생으로 알려져 있어 항상 불안 불안하다.

특히 P씨가 반갑게 인사할 때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던 어느 날, 퍼렇게 질린 P씨는 Q에게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을 죽였다. 지금 토막 내서 냉장고에 보관 중이야. 어쩌지?’

 

P는 정말 해결책을 원하는 눈빛이었다.

Q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코리안 바로크는 현재 우리 신문 사회면에 실존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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